brunch

매거진 문자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nsom Lee Jan 21. 2016

사릉역에서

이빈섬시집

기차는 오지 않았다

단종을 태우고간 날

기적도 울지 않았다

80년 기다린 대합실 너머

생각하고 생각할 思

밭에 쪼그려 앉은 마음의 무덤

호미로 찍어내던

밭고랑 몇개 사릉사릉 지나갈 뿐

보약처럼 마신 죽음 한 사발

뻐꾸기 몇 마리가 뒤엎인  그릇 위에

흰 똥을 갈겼다

희망은 음란한 시절의

꽃냄새같은 것이다

하루 세번 어김없이 기차는 왔지만

대합실은 멋쩍게 빈 속을 보여줄 뿐

기차는 사람 대신

독수공방하는 무덤을 태웠다

무덤 앞으로 뻗은

흰 버선을 실었다

가고싶다는 것

사랑하고 싶다는 것

전서체의 글씨 속에 들어앉은

허벅지의 미세한 경련

천연기념물이라는 누란(淚蘭) 일 점

마른 분에서 시들어가고 있다

기차 끊긴 철길 

뒤 붙인 개 두 마리

함께 이쪽을 바라보는

서러운 이승

죽은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제삿상 꽃잎 몇 장

나라도 그만 풀밭에 자빠져

숫사마귀처럼 섹스하고 싶었다

어린 조선이 늙은 제 마누라 곁을

사릉사릉 지나가는 

저녁답 간이역


<이빈섬시집>

매거진의 이전글 괴물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