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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Jan 21. 2016

가슴에 큰 선비를 품은 여인

장계향 (1598-1680)


경당(敬堂)은 웃었다. 그의 앞에는 다섯 살 짜리 여자 아이가 붓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래. 네가 어떤 시를 짓겠다는 말이냐?” “그것은 스승께서 정해주옵소서.” 경당은 경광서당(鏡光書堂)의 강당 마루 한복판에 곧은 자세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1600년 봄. 누(樓) 바깥에는 청성산(靑城山)의 산그림자가 아래에 흐르는 낙동강에 떨어져 있는 오후였다.


 “좋다. 그렇다면 오언을 절구(絶句, 4행)로 짓되, 기승전결에 모두 성인(聖人)이란 말이 들어가고 볼 견(見), 얼굴 면(面)으로 운(韻)을 밟아보는 것은 어떠하겠느냐?” 


오언이라면 다섯 글자일 뿐인데 그중에 두글자가 성인을 써야한다면 나머지 세 글자만 사용할 수 있는 셈이다. 4행을 모두 그렇게 지어야 하고 거기다 운까지 맞춰야 하니,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는 절구이다. 꿇어앉아 이 상황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당돌하게 등장한 소녀를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녀에게 경당은 다그치듯 말했다. 


“어떠냐? 한번 해볼 수 있겠느냐?” 


소녀는 생각이 아직 그치지 않은 듯 눈을 살풋 감으며 대답했다. “예. 스승님. 한번 해보겠습니다.” 일순간 서당의 학인(學人)들 속에서 놀라움의 소란이 일었다. 다시 잠잠해지자 소녀가 또박또박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不生聖人時(불생성인시)

不見聖人面(불견성인면)

聖人言可聞(성인언가문)

聖人心可見(성인심가견) 


성인과 같은 때에 태어나지 못했기에

성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인의 마음은 볼 수가 있습니다 


“오호. 서책(書冊)을 통해 성인의 말씀과 마음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로구나. 시어(詩語) 한 글자도 낭비하지 않고, 아껴써서 학문권면(學文勸勉, 공부에 힘쓰게 함)의 깊은 뜻을 아름답게 담았구나.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경당 고제자(高弟子)로 꼽히던 시명(時明)이 말하였다.


“스승의 따님으로 여기 앉힐 분이 아니라, 학문의 도반(道伴)이어야할 빼어난 소객(騷客,시인)이라 하겠습니다.”


“허허. 시명이 이토록 후하게 평가를 하니, 아이에게 경광서당의 기둥 뒷자리라도 아깝지 않게 내줄 명분이 생기는구려.” 


경북 영양은 장계향(1598~1680) 한 사람으로도, 안동이나 양동에 못지 않은 카랑카랑한 유향(儒鄕)의 반열에 족히 서는 고장이다. 그런데 장계향은 조선의 여성이며, 남겨놓은 학문적 성취도 없으며, 그의 제자들이 그를 떠받들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규중(閨中)에 깊이 파묻혀 살아간 자취조차 더듬기 어려운 ‘희미한 옛사람’이다. 그가 어찌하여 안동의 퇴계 이황이나 양동의 회재 이언적이 남겨놓은 족적과 맞먹을 만큼 영양의 학문적 위상을 높여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장계향이 ‘이야기’가 되는 비밀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계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 ‘스승’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인 장흥효(1564-1634)로 37세의 경광서당 당장(堂長)이었다. 흥효는 12세 때 김성일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다. ‘소학’과 ‘근사록’에 파고드는 소년을 본 김성일은 “이 사람의 배움은 단호한 힘이 있어 후일 크게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3세가 되었을 때 이번엔 유성룡을 찾아간다. 마침 타오르는 등불을 보면서 유성룡이 물었다. “저 불의 텅빈 곳이 이(理)인가?” 흥효는 대답했다. “허(虛, 텅빈 것)와 실(實, 실체가 있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데, 이(理)에는 서로 마주 볼 것이 없으니, 텅빈 것을 이(理)라고 부르긴 어렵겠습니다.” 그때 유성룡이 말했다. “허허. 허(虛)에도 실(實)에도 이(理)는 항상 존재하는 것일세.” 또다른 퇴계의 제자인 정구를 찾은 것은 그 뒤였다. 그와도 ‘물(物)’의 존재에 관해 논쟁을 벌였는데, 두 사람은 “왜 우리가 미리 만나지 못했던가” 하며 아쉬워했다. 장흥효는 벼슬에 뜻이 없었으며, 오직 독서와 교육에만 열정을 쏟은 고결한 학자였다. 그의 정신 속에는 퇴계의 최고 제자 3명의 학문이 좁은 물길에 모여들 듯 한 줄기로 들어와 흐르고 있었다고 할 만하다. 퇴계가 눈을 감은지 30년. 그의 1대 제자들의 학문을 섭렵한 장흥효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선비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아들이었다면, 퇴도(退道, 퇴계의 학문)를 이을 적통일 것을.” 그는 연어헌(鳶魚軒)에 기대어 강물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안동권씨에게 장가를 가서 35세에 딸 하나를 두었다. 이 딸이 총명하고 호학(好學)의 기풍이 있던지라, 아비는 흐뭇해 하면서도 조선이란 사회에서 학행을 떨칠 수는 없는 질곡을 떠올리며, 깊이 아쉬워하고 있었다. 더구나 저 시는 바로 퇴계의 시조 ‘고인은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못뵈 / 고인을 못뵈고 가던 길 앞에 있네 /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쩔꼬’와 빼닮지 않았던가. 흥효가 자신의 호를 경당(敬堂)로 삼은 것도 ‘경(敬)’의 학자인 퇴계에 대한 사모 때문이었다. 


계향이 12살 때, 흥효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북송의 성리학자인 소강절(1011-1077)의 원회운세(元會運世)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소강절은 음양의 2원법을 음양강유(陰陽剛柔)의 4원법으로 풀어나간 사람이다. 즉 4의 배수로 만물과 시간을 설명하는 것이다. 흥효는 말했다. “여덟 각(刻)은 한 시(時)를 이루고, 열두 시는 한 날(日)을 이루며, 서른 날은 한 달(月)을 이루고, 열두 달은 한 해(年)를 이루는 것은 알 것이다. 소선생은 30년이 모이면 하나의 세(世)가 되는데 인간의 한 대(代)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두 개의 세(世)인 60년을 살다 가고, 세가 열둘이 모이면 운(運)이 된다. 1운은 360년이다. 서른 운은 한 회(會)가 되고, 열두 회는 원(元)이 된다.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때의 그 원이다.” 갑자기 숫자가 쏟아지자 학생들은 멀뚱멀뚱 바라만 본다. 흥효는 물었다. “회는 몇 년이고, 원은 몇 년이냐?” 좌중에 대답이 없었다. 정적이 흐르자 기둥 뒤에 있던 계향이 말한다. “회는 계산해보니 1만800년이고 원은 12만9600년이었습니다.” 주판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12세 아이가 암산으로 꽤 복잡한 곱셈을 풀어낸 것이다. 


흥효의 제자 중에 영해부 나랏골 출신의 이시명이라는 빼어난 제자가 있었다. 사윗감으로 몹시 탐이 났지만 그는 이미 광산 김씨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이시명이 얼마나 독서를 좋아했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한양의 시장 거리에서 살았던 그는 허름한 집 마루에 꼿꼿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소년이 괜히 폼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 장터의 한 건달이 집 뒤로 숨어들어가 언제 책 읽기를 그치는지 지켜보았다. 하루 종일 움직이지도 않고 독서를 하는지라 건달이 탄복하여 마루에 복숭아 몇 알을 놓고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운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명의 첫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이후 흥효는 가만히 딸을 불러 말했다. “시명의 재취(再娶) 자리라도 상관 없겠느냐?” “아직 상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분인데...” 계향이 말끝을 흐리자, “그건 기다리면 되느니라. 다만 네 학문과 재능과 열정이 아까우니, 너는 이 조선세상에서 큰 학문을 펼쳐놓거라. 지필묵에 깃드는 학문이 아니라 영육(靈肉)에 깃들어 한 시대를 여는, 소리없는 학예를 닦으려무나.” 


계향은 규중의 속박이 느껴져 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흥효는 시명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 딸이 혼기를 놓쳐 과년하니 자네가 사윗감을 하나 구해주면 어떤가.” “어찌 스승님께서 제게 그런 청을...” “자네만큼 미더운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한번 찾아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좋을지...” “ 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지 않나? 신체는 자네처럼 듬직하고 말은 자네처럼 묵직하고 글은 자네처럼 명쾌하고 사람됨됨이는 자네처럼 호학하는 사람이면 좋겠네.” 이렇게 말해도 시명은 눈치 채지 못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자네가 있지 않나? 내 딸을 좀 살려주게.” 


시명의 부친 이함은 김성일의 심학(心學)을 추종하는 학자였다. 그는 집 옆에 강학당을 짓고 명나라 고황제의 글씨를 탁본해 ‘호학당(好學堂)’이란 현판을 달았다. 그는 자손과 제자를 불러놓고 말했다. “이름은 내가 세웠으니 그 실질은 너희가 채워라.” 장계향의 시댁은 그런 집안이었다. 시집을 와보니 온통 초상집이었다. 시명의 형인 두 사람이 잇따라 세상을 떴고, 두 부인들은 순절을 했다. 아이들만 바글거렸다. 19세 새색씨는 시부모, 시동생에 조카 다섯과 전처 소생 셋, 그리고 남편을 챙겨야 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일곱 아들을 키운다. 면면을 보자. 전처의 아들인 이상일은 유성룡의 손자사위가 되며 7산림(山林)으로 꼽힌다. 그의 아들인 이휘일과 이현일은 퇴계의 적통을 잇는 대학자로 자라난다. 휘일이 이조판서가 되는 바람에 계향은 ‘정부인’이 된다. 또 현일은 서인(노론)을 대표한 송시열에 맞서는 퇴계 학맥의 중심이다. 이승일, 이정일, 이융일, 이운일 또한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 손꼽힌다. 


계향의 일곱 아들을 보노라면, 조선의 한 여인이 온 몸으로, 전 생애를 바쳐 써놓은 한 바탕의 경전을 보는 듯 하다. 아들 중에서 두 사람(휘일, 현일)은 불천위(不遷位, 학행과 공로를 기려 세월이 지나도 위패를 옮기지 않음) 제사를 받는다. 휘일은 어머니가 처녀 시절 그토록 학문에 뛰어났고 독서에 열중했던 여인인줄 까맣게 몰랐다. 그가 병이 들었을 때 어머니는 그에게 아주 유려하고 감동적인 한자 편지를 보냈다. 이에 그는 놀라서 외가를 뒤져 어머니의 글들을 모두 찾아냈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주문한 놀라운 미션을 훌륭히 이뤄냈다. 


퇴계 학맥이 서슬 퍼렇게 살아 내려온 것은, 남자들의 힘이기도 하지만, 저 숨어있는 여인 장계향 한 사람의 열정적인 희생이기도 하다. 큰 뜻을 위해 저토록 헌신적인 삶을 산, 그녀가 아름답지 아니한가./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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