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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Feb 27. 2016

지리산 들꽃산방의 하룻밤

빈섬, 영혼의 투어

#1


[Canon] Canon DIGITAL IXUS 85 IS (1/3)s iso400 F4.9


여행이란 길에 관한 명상이다. 길은 가고나면 뒤에 있다고
말한 사람은 황지우였다. 모든 길은 보행자의 경전이며
걷는 일은 생이란 이름의 순례이다. 이어령선생이
'걷기' 운동을 제창한 것은 그가 늙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선배 k였다. 늙은 사람은 뛰지 않는다.
체력이나 기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의 왕성하고 기발한 활동에서 
돌아와 평범을 발견하게되는 시기의 통찰과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
어슬렁거림, 소요. 문제들을 진정시키는데에
혹은 암울한 기분을 약간 상기되게 하는데에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보행은 영혼을 기분좋게 자극하는
무엇이 있다. 보행은 스스로 상징을 만들어낸다.
문자의 行과 걸음이 만드는 행은 나란히 걸어간다.
글을 쓰는 것은 문자가 걸어가는 것이다.
문자도 보폭이 있고 가끔 앉아서 행간을 구경하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쉬엄쉬엄 걷기도 한다.

정지된 것들은 뿌리를 키울 수 밖에 없다.
애착이나 집착이 그런 것들이다.
여행은, 소유를 헐겁게 하는 수행이다.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소유한 것의 무게를 줄이는
여행의 지혜를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다.
여행은 지나가는 마을을 아름답다고 경탄하지만
거기서 눌러살지 않는다. 지나가는 마을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면서 지나갈 뿐이다. 지나가는 마을이 사랑스런
이유는, 그것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지켜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소유의 질곡에서 벗어나 있기에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다.
세상이 내 것이 아니며 세상에 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헐벗은 정신이야 말로 여행자를 담담하게 하고
고독하게 하고 가만히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2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3.5


평상심이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란 평소에 가졌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위급하고 어지러운 상황을 맞았다 하더라도
보통 때처럼 담담하게 대하라는 뜻이 아닐지요.

평소에 가졌던 마음이, 지금의 마음보다 더 옳는 뜻인지요.

옳고 그르다는 비교는 아닐 것입니다.
평상심은 평(平)의 마음과 상(常)의 마음을 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의 마음은 뛰어오르거나 내려앉는 마음이 아닌
수면처럼 고른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상의 마음은 끊기거나 막힌 마음이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계속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상심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평상한 시절에는 당연히 평상한 마음을 갖지만
위기의 시절에는 평상한 마음을 유지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평상한 시절에는 비록 평상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별로 없지만
평상하지 않은 시절에는 평상심을 잃어버리면
문제를 더욱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상심은 쪽배가 출렁일 때 당황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당황하는 사람은 출렁이는 쪽배의 한쪽으로 몸을
움직입니다. 그쪽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이지요.
그러나 배의 외곽에 매달릴 수록 배는 더욱 출렁거리게 됩니다.
평의 마음은 잔잔한 수면처럼 행동하는 마음이요,
상의 마음은 한결같이 중심을 유지하는 마음입니다.
쪽배의 중심에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듯
평상심은 위태로움을 키우지 않는 가장 확실한
마음이며 태도입니다.

비상(非常)의 때에 상(常)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한결같지 않으며
운명적으로도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태어나는 인간, 죽어가는 인간이,
한결같이 행동하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상(常)은 어쩌면 인간에게 속한 미덕이 아니라
영원불변의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권세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상(常)은
영원에 대한 깊은 향수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3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3.5


수행자는 어찌하여 벽을 향해 앉는 것입니까.

벽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벽은 길이 끊어진 자리인데 벽이 어찌 길이겠습니까.

지금까지 걸어온 것은 길이 아니라 습관이었습니다.
거기 길이 펼쳐져 있었기에 내가 생각없이 발을 디딘 것일 뿐입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일 뿐, 진짜 길이 아닙니다.

진짜 길은 벽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벽은, 습관처럼 걸어온 길을 끊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자가 만나는
길의 시작입니다.

면벽(面壁)은 길을 찾는 일입니까.

면벽은 절벽 앞에 선 인간이 어떻게 산을 지나갈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절벽은 무엇입니까.

유한입니다. 죽음입니다.

결국 죽어할 인간이 죽음을 넘는 것을 그토록 고민해야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이야 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하고 치명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죽음을 넘을 수 없다면 죽음을 넘겠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오히려 부질없는 것이 아닐지요.

지금 말씀하신 그 질문이 바로 지금 이 앞에 놓인 벽입니다. 그 질문이야 말로 문제의 그 벽입니다.
벽이 길이라는 말은, 길이 끊어진 곳이야 말로 
무한으로 펼쳐진 길이라는 뜻입니다.
도(道)는 거기서 움직입니다. 벽은 길의 반자(反者)이며, 움직이는 길이 바로 벽입니다. 처음 보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걸어가라.
그것이 면벽의 명령입니다.



#4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3.5


종교는 무엇입니까.

종교는 질문하지 않는 것입니다. 

질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실체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질문과 대답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종교가 응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무엇을 응답하고 있습니까.

죽음에 관해 응답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 아닙니까.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의 문제입니다. 종교가 살아있는 동안의 복락이나 안전을 약속한다면 그것은 종교의 권역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祈福)이나 무의(巫儀)를 종교로 볼 수 없는 것입니까.

많은 종교들이 삶을 간섭하지만 그때조차도 죽음으로 삶을 설명할 뿐입니다.  종교가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삶에 바쁘고 곤고한 자를 위한 장식물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해 인간의 입이 아닌 다른 크고 무거운 입으로 응답을 해주는 방식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까.

인간 이상의 것을 인간이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종교가 질문을 차단한 까닭은, 질문은 인간의 분별과 이성을 넘어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까.

많은 질문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따집니다. 신의 존재, 절대자의 존재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삶에 속한 인간이 죽음까지를 응답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질문할 수 없습니다.

그 절대자에게 죽음은 무엇입니까.

완전한 존재의 본체같은 것이 아닐지요. 삶은 그 본체에 깃든 아주 작은 변두리이고요. 존재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그것에 종교는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모르겠습니다.



# 5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4.5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율은 신의 명령입니까.

인간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것들을 정리해준 것이 아닐지요.

도덕이 선험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도덕은 신이 기뻐하는 일일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율은 인간 이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은, 타인이 자신에게 하지 말아야할 행위를 자신 스스로도 타인에게 하지 않는다는 황금률에 기반하고 있다고 봅니다.  살인 금칙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이성적 장치이며, 절도 금칙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간음 금칙은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규범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모든 도덕과 법률들은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이 도덕이나 규범들을 상대적으로 덜 가진 이유는 그들이 인간만큼 정치한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지요. 

인간의 이성이란 신이 인간에게 불어넣어준 지혜일 것입니다. 관계를 지혜롭게 꾸려가기 위한 규범 또한 신의 지혜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6


들꽃산방 주인 조혜숙 어록



- 남자 옷은 호주머니가 여럿 달려 있습니다. 여자 옷은 없거나 대개핸드백 하나에 소지품을 넣어다니죠. 남자의 호주머니는 작고 얕으며 자잘한 물건들이 여러 개 나뉘어 들어갑니다. 여자들은 몸뻬 속 중요 부위에 큰 호주머니 하나를 만들어넣고 거기 모든 물건들을 깊이 감춥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는 방식도 비슷하지 않을지요. 남자는 작은 호주머니같이 이곳저곳의 사랑을 합니다. 한꺼번에 여러 개도 관리합니다. 호주머니 하나가 구멍이 나면 다른 호주머니를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여자들은 호주머니 하나에 대개 자기 존재 전부를 넣어둡니다. 이 주머니가 아니다 싶으면 주머니 전부를 옮기려 하지, 작은 딴주머니를 꿰매서 차지 않습니다. 


- 머리에서 사랑하던 것이 가슴에서 사랑하는 것으로 내려오는 시간이 3년 걸렸고, 머리에서 이해하던 이별이 가슴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내려오는 시간은 6년 걸렸습니다.

- 신라나 조선이나 지금이나, 사랑과 음란의 총량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다만 어떤 식으로 즐기고 훔치느냐의 차이와 양상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빈섬.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4.5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Canon] Canon EOS 400D DIGITAL (1/3333)s iso400 F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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