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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Feb 27. 2016

프랑스 중위의 여자, 그 치명적 매력

안예쁜 팜므파탈, 존 파울즈와 톨스토이, 그리고 영화들

프랑스 중위의 여자, 안 예쁜 팜므파탈 - 이빈섬.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1969)는, 사랑 주위에 떠도는 모호한 기표들이 일으키는 파문을 인상적으로 다뤘다. 1867년 영국 남서부해안의 '라임'이란 마을을 무대로 삼았다. 금수저 집안의 학구적인 고고학 연구가인 찰스 스미스는 부유한 상인의 딸인 어네스티나 프리먼과 약혼을 한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과 결혼은 의심할 나위 없는 것이었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바람이 거센 방파제 끝에 서있는 여인 사라 우드러프가 찰스의 눈에 들어오기까지는 말이다.


파도가 삼킬 듯한 길의 끝자락에서 형언할 수 없는 눈빛과 표정으로 사라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소리를 치는 찰스를 바라본다. 


존 파울즈는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내 말을 믿어주오. 나는 정녕 몰랐소. 남녀간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무료한 그 휴일, 마을 벌판에서 테니슨의 말처럼 오랫동안 내키지 않은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캡도 보닛도 쓰지 않은 한 처녀에게 내 눈길이 멎을 때까지는."

            

이 여인이 불러 일으키는 연민과 불행의 한가운데서 뿜어내는 고혹적 시선은, 아무 문제 없었던 찰스의 내면을 흔든다. 까닭도 알 수 없이 조금씩 스며들어 존재를 뒤덮고 마는 한 여인의 그림자. 이걸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여자의 불행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녀의 별명이 되어버린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몇 년 전 이 해안에 큰 부상을 입은 채 상륙했던 프랑스인 중위 바르귀엔과의 사연 때문에 생긴 호칭이었다. 


허리에서 무릎까지 찢어진 깊은 상처를 신음도 없이 감내하는 것에 매료된 사라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나 어정쩡한 태도로 그를 보내고 만다. 그러나 곧 바로 그를 찾아갔는데, 해변의 모텔에서 다른 여자와 나오는 그를 발견한다. 그녀는 절망에 빠졌다. 그 뒤 이곳으로 와서 기약도 비전도 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사랑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니고, 증오도 아닌, 하나의 기구한 습관.








동정과 공감은 두 개의 내면이 서로 같은 상태가 되는 동전의 양면인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소외받고 고립되는 상황은 찰스의 마음을 부추겼고 스스로를 '프랑스 중위의 창녀'라고 말하는 자학적 태도는 찰스의 순수한 사랑을 오히려 돋운다. 또 질병에 이른 지독한 우울과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그림자는 찰스를 그녀 쪽으로 움직이도록 만든다. 존 파울즈는 톨스토이의 소설 '악마'에서 사라를 데려온 것일까. 원시적이고 부정적이며 뒤틀린 매혹이 그의 생을 뒤바꿔버린다.


1981년 개봉한 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카렐 라이즈 감독)는 존 파울즈의 19세기 소설 무대와 그것을 영화로 찍는 20세기가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인상적인 액자소설 구도이다. 사라 - 애나 - 메릴이며 찰스 - 마이크 - 제레미다. 사랑과 인생에서 어디까지가 연기이며 어디까지가 진실이며 또한 어디까지가 자아인지를 묻는 이중삼중의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실 속에서 마이크와 애나는 제각각 기혼남녀이지만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실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연기가 끝나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 속은 어떤가. 파혼까지 감행한 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사라(메릴 스트립)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온데간데 없다. 3년간 행방을 찾아 헤맸으나 그녀를 찾는데 실패하면서 찰스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소설은 해피엔딩과 언해피엔딩 두 개로 길을 열어두고 있다. 톨스토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해피엔딩 쪽으로 노를 젓는다.


사라 역에 메릴 스트립을 쓴 것이 절묘하달까. 사라는 찰스의 약혼녀인 어네스티나보다 예쁘지 않으며 기품이 있지도 않아야 한다. 남자의 사랑이 일어나는 핵심공식을 교란시키는 '알 수 없는 매혹'을 연기할 수 있는 건 메릴 이상 가는 배우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연기파 배우 메릴의 눈빛과 표정은 이때부터 사람 잡는 구석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놀랍게도 부천 팬터스틱 영화제에서 동명의 한국영화가 개봉되었다. 2007년의 일이다. 백승빈 감독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개봉 2년전에 타계한 존 파울즈에게 바치는 '프중녀 키드'의 3차 저작물이라 할 만하다. 광호(우준영)의 어머니(김상현)는, 알고보니 사라였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대한민국까지 날아온 것도 신통방통이지만, 그녀가 백혈병을 앓다가 결국 최후를 '우리'와 같이 했다는 것 또한 뜻밖의 자부심이 되었다. 하나의 스토리가 이렇게 변주를 이루고 파장을 넓히며 '기묘한 사랑'을 널리 전파하고 있는 현상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톨스토이와 존 파울즈의 '악마 사랑'이 이제 외래종을 넘어서서 자생종이 나올 법도 하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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