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중삼우쟁론기
우리 집엔 세 개의 가위가 있다. 손가락이 들어가는 자루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붉은 가위, 노란 가위, 검은 가위다. 모든 가위에게는 가위의 문제가 있다. 가위는 늘 문제다. 세 개의 가위들의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다. 날이 무디어졌다는 얘기도 아니다. 가위의 문제는 그것 이상이다. 세 개의 가위를 한 자리에 두기 전까지는 나는 저것들이 각자 다른 빛으로 다른 서랍 안에 들어가 존재하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가위들이 서로 귀를 대고 있으니, 저들도 제법 오래된 식구같다. 반가운 표정인듯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NIKON] E4500 (1/21)s iso100 F2.6
셋은 여자와 닮았다. 이를 테면 여자 셋이다. 세 여자는 다 자기가 가장 예쁜 줄 알고 있으며 가장 솜씨가 뛰어나고 가장 주목받는 생인 줄 알고 있다. 그것도 문제다. 가운데 있는 젖은 놈이 가장 일을 잘한다는 얘기를 내가 하더라고, 가위들에게는 얘기하지 말라. 궂은 일을 묵묵히 하지만, 사실 이젠 좀 늙었다.
[NIKON] E4500 (1/8)s iso100 F2.6
가장 이쁜 티를 내는 노란 놈은 남대문 알파문구에서 충동 구매한 것이다. 독일이던가, 어느 유명한 회사 제품인 걸로 안다. 녀석의 장점은 섹시한 손잡이에 있다. 셋 중에서 손가락이 닿는 원형의 내부 가장자리가 가장 부드럽다. 내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검지 중지 약지의 사이즈와 길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을 끼우기만 하면 은근히 꼭 잡아준다. 날도 가장 잘 살아있고 잘라야할 사물을 베물고 가는 힘도 가장 좋지만, 그래서 자꾸 아끼게 된다. 녀석은 책상 서랍에서 낮잠을 자는 일이 허다하다.
[NIKON] E4500 (1/5)s iso313 F3.5
검은 놈은 자루와 자루 사이에 상어 이빨같은 걸 달고 있다. 저게 무엇에 쓰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쨌거나 저걸 보면 늘 울화통이 터져 이를 악물고 있는 듯한 표정을 느낀다. 그럴 만도 하다. 녀석은 주로 주방일을 하는데, 김치를 자르고 파를 쑹쑹 썰고 심지어 무도 자른다. 큰 식칼을 꺼내 도마 위에 써는 걸 귀찮아 하다보니 자연히 그런 일을 저 녀석이 맡게 됐다. 녀석에게는 늘 양파 냄새같은 게 난다. 녀석을 며칠 물 속에 둬도, 녹스는 법이 없다. 세 여자 중에서 가장 '마누라스런' 녀석이다.
[NIKON] E4500 (1/3)s iso136 F3.5
이건 누구의 입술이냐 하면, 노란 놈이다. 가장 날카롭다. 그 날카로움은 넓은 허리에서 출발하여 급격한 사면을 이루며 좁아져 들어가면서 생겨난다. 날끝의 윗부분의 면을 가파르게 깎아지름으로써 날카로움을 더했다. 요컨대 저 가윗날의 컨셉트는 날카로움이다. 가위란 끝을 쓰는 물건이 아니고 두 입술 사이에 생겨난 긴 날을 활용하는 것인데 굳이 끝을 저렇게 날카롭게 한 까닭은 그의 성미라 할 만하다. 저 날카로움은 무엇이든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 깐깐함과, 엄격하고 빈틈없음을 과시한다.
[NIKON] E4500 (1/6)s iso100 F3.5
세 여자가 저렇게 나란히 자기의 '중심 부위'를 드러내고 있는 걸 바라보면, 누드쇼같다. 가끔 나는 이런 종류의 실없는 생각을 한다. 사무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혹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언더리스'라면? 물론, 추운 날엔 불가능한 일이지만, 장관을 이룰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날을 정해서, 특히 국경일같은 날에, 옷이라는 것이 주는 '위선의 원형'을 잠시 떼어낸다면 세상이 훨씬 솔직해지고 평등해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진다.
[NIKON] E4500 (1/6)s iso100 F3.5
가위가 다리를 있는 힘껏 벌리고 있는 모양새는, 고함을 지르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잡아 먹으려 한껏 독이 올라 있는 것 같다. 가위는 다리를 벌리고 있을 때 위험하다. 다리를 벌린 가위를 보면 무엇인가를 자르고 싶어진다. '화장실에 낙서하는 놈은...'이라고 씌어진 뒤에 표시된 가위를 본 적이 있던가. 무엇인가를 잘라버리겠다는 엄포. 그것은 치명적인 공포를 불렀다. 성기절단 공포는 심리학 책에도 나오는, 학문적인 공포이다. 여자들은 그런 공포가 없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성기 절단의 욕망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며칠 전 기사에도 문제 있는 남편의 '주요 부위'(세상에! 이렇게 표현했다)를 부인이 반쯤(!) 잘라낸 사건이 실렸다.
[NIKON] E4500 (1/4)s iso263 F3.5
가윗날과 가윗날을 함께 붙들면서도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교차점에는 납작이 못이라 할 만한 게 박힌다. 저 못이 얼마나 실한가에 따라 가위의 품질이 결정되기도 한다. 저 부위를 '사북'이라고 한다. 사북은 두개의 사물을 고정시키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역할도 한다. 두 개의 날을 물고서, 그것을 잡고 풀어주는 능력. 그 사북의 능력이 실은 가위의 힘이며 가위의 실력이다.
[NIKON] E4500 (1/3)s iso120 F3.5
나는 여자들끼리 팔짱을 끼고 걷는 걸 바라보면, 거기엔 기묘한 암시같은 게 있다는 생각을 한다. 뭐랄까, 팔짱을 끼고 싶은 욕망과 팔짱을 방어하고 싶은 욕망이 그 한 동작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여자 아닌 누군가와 끼어야 하는 것을, 샘플로 보여주는 과시와, 이미 누군가에게 점유되어 있는 상태라, 감히 남자 따위가 틈입할 수 없는, 꽉 찬 옆구리를 보여주는 과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여자들은 때로 저렇게 다정하게 드러누워 긴 얘기를 한다. 가끔 나는 멍청하게도 그 얘기를 귀담아 들어보기도 하는데, 사실 저 여자들은, 이야기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란 것만 알게될 뿐이다.
[NIKON] E4500 (1/3)s iso169 F3.5
노란 녀석의 두 귀 사이엔 완충장치가 달려있다. 우리가 가위를 쓸 때의 어떤 심리를 포착한 장치이다. 우린 무엇인가를 자를 때 처음엔 조심을 하다가 끝에 가서는 너무 과격하게 잘라낸다. 무엇인가가 잘려나가는 쾌감이 그런 충동을 키운 탓이다. 여자를 대할 때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과도한 조심과 주의로 다가가지만, 조금 지나면 그 사려깊은 첫 마음을 놓쳐버리고는 오로지 자기의 욕망과 관점으로 '관계'를 밀어붙인다. 이게 문제다. 저 완충장치를, 당신의 마음에도 달아놓는 게 좋다. 끝에 가서 더욱 부드러우라. 살살, 다뤄라. 그게 오래 간다. 저 가위처럼.
[NIKON] E4500 (1/3)s iso104 F3.5
사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이거나 면일 뿐이다. 직선일 경우도 있고 곡선일 경우도 있고, 직면일 경우도 있고 곡면일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건 그것이 필요한 때 나타나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허리가 그렇다. 허리는 잘쏙해야 한다. 여자의 허리라면 남자가 팔을 둘러 감기 딱 좋은 사이즈가 미의 핵심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 잘쏙함이란 가슴 부위에서 마음껏 사용한 사이즈와 히프 부근에서 또 신나게 부풀린 부피의 가운데에 있는 허리가 지녀야할 미덕이다. 그 선은 흘러가는 선이다. 그 선이 자기를 고집해서 가슴과 히프 사이즈를 고집한다면 단연 무같은 몸매가 된다. 저 노란 놈의 허리에 다섯 홈으로 파낸 '인공 주름'을 보라. 곡면이 돌아가는 자리에 지는 주름을 표현한 저 아름다움은, 세상의 아름다움이 생겨나는 이치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NIKON] E4500 (1/4)s iso341 F3.5
외국인들은, 이땅의 사람들이 냉면을 가위로 잘라먹는 것에 대해 기겁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식가위' 문화가 보급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처음 냉면을 먹으면서 가위를 들이대는 종업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위는 천을 자르거나 종이를 자르는데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외국인스러운가. 하지만, 가위로 냉면과 김치, 깍두기를 잘라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를 안다. 놀라울 지경이다. 가윗날에 잘려져나가는 뼈에 붙은 돼지갈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군침이 절로 돈다.
[NIKON] E4500 (1/4)s iso104 F2.9
열린 가위를 보면 얼른 닫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의 청바지의 남대문이 열려있을 때처럼,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열려 있는 가위는 위험하다. 그것이 무엇을 잘라버릴까도 걱정이지만, 섣불리 아무 것에나 입을 대다가 스스로 다칠 일도 걱정이다.
[NIKON] E4500 (1/7)s iso100 F2.9
이 빈약한 일제 가위는 아이가 학용품으로 쓴다. 아이는 아빠가 쓰는 노란 가위에 눈독을 들이면서 이 가위를 쓰는 편이기에, 이 빨간 녀석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좀 서러울 지도 모르겠다. 빨리 쓰고 버리려는 주인에게 귀를 붙들린 채 건성으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생이 불만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물자가 귀하던 옛 시절이라면, 녀석도 미움 받거나 소박 받을 일이 없다. 문제는 풍요에 있다. 그러나 녀석의 질투는,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의 부족에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손에 쥐기에 불편하고, 두 날을 교차시켜보면 불쾌한 소리가 난다. 무엇보다 히프살이 없어서 탄력과 힘이 부족하다. 하지만 종이를 자르는데, 엄청난 탄력과 힘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는가.
[NIKON] E4500 (1/6)s iso100 F2.9
그러나 곰곰히 보면 녀석에게도 이쁜 구석이 있다. 귀는 애교스럽고 흘겨뜬 눈도 봐줄 만하다.
[NIKON] E4500 (1/4)s iso100 F2.9
그러나 그런 부차적인 매력을, 저 실한 다른 가위들의 매력과 동렬에 놓을 순 없다. 더구나 고생을 한 '와이프스런' 가위에게, 대들다가는 본전도 못찾는다. 요컨대, 자기 자리에서 행복한 게 살아가는 요점이다.
[NIKON] E4500 (1/4)s iso309 F2.9
삶은 때로 슬픔이다. 사랑도 때론 참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많은 문제는 내구성의 문제다. 세월을 견디지 못한, 짧은 사랑들은 그래서 늘 화르륵 지는 낙화처럼 무상하다. 한 여자, 두 여자, 세 여자가 있지만, 저토록 사뇌(思惱)하는 표정을 가진, 손에 물묻은 저 여자를 굳이 마음에 더욱 두는 건, 늘 곁에 존재함 자체가 가장 큰 위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김치냄새가 나는 저 여자, 생각이 난다. binsom@copy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