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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Oct 14. 2015

정원태 가옥의 비밀

읽기의 즐거움

김정미기자가 쓴 '산을 닮은 집'을 읽는다. 문득 19세기 초에 지어진 정원태 가옥에 눈이 머문다. 지붕 관리가 엉망이어서 고택이 처량해보였다는 김기자의 현장 리포트를 읽으며 책 아래에 있는 작은 주석글들을 읽어본다. 정원태 가옥은 계산 정원태(1913-1993)가 태어난 집이라고 한다. 그 호의 의미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산 이름이라고 한다. 정원태가 이 마을과 자신의 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분이 마침 영일정씨인지라 나와도 피가 통하는 듯 하여 자꾸 관심이 간다. 어머니가 포은 정몽주 가문인 것을 자랑삼아왔기에 내 DNA의 한 축에는 포은의 기질이 흐르고 있다고 믿어왔다.

 


정원태의 부친은 정구택(九澤)이고 조부는 정운호(雲灝, 1862-1930)이다. 김기자는 아예 부친을 건너뛰고 조부 이름을 실어놓았다. 집안에서도 이 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제천시에서 내놓은 디지털문화대전이라는 인터넷 자료엔 1892년생으로 되어있다. 엉터리다. 이분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 부대(호좌의진)에서 의병으로 활동을 하는데, 단발령이 있었던 해가 1895년이다. 4살짜리가 의병으로 싸웠다는 얘기인가. 정운호는 자를 백상(伯祥)이라고 쓰고 호를 계릉(桂陵)이라고 썼다. 계릉은 계산의 언덕이라는 뜻이니, 정운호 또한 월림리의 그 집에 살았을 것이다. 19세기 초에 지어진 집이라면 아마도 정운호보다 더 윗대여야 한다. 부친은 그는 누구일까. 정일원(一源)이다. 정일원(1827-1889)은 건재(健齋), 임정(林汀)이라는 호를 썼다. 19세기 초반에 이 고택을 지을 때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집은 정일월의 부친인 정해기(海箕)의 부친 정택현(鄭澤鉉)이 지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정운호의 증조부인 정택현이 지었을 이 집에 살다간 이들을 살펴보면, 뜻밖에 가문이 카랑카랑하고 문기(文氣)가 예사롭지 않다.

 


우선 이 동네의 이름은 월림(月林)이다. 고려때 원림(員林)이라는 부곡 이름이었다고 하지만, '달의 숲'이라는 이름이 너무 멋지지 않은가. 게다가 그 월림의 산 이름이 계수나무 산(桂山)이니 비유의 아귀가 착착 맞질 않은가. 게다가 월림에는 정원태와 정운호의 조상에 관한 스토리가 숨어있다. 17세기의 정양(鄭瀁1600-1668)은 정운호 가문의 한 자부심이다. 그의 책 '포옹(抱翁)집'은 집안의 후손들이 정리해 펴냈다.정양은 병자호란 이후 죽기를 결심했다가 속세를 버리고 봉화의 문수산에 들어가 깨끗한 여생을 지낸다.이를 높이 기려 명나라의 의리를 지킨 다섯 은둔자(태백5현)로 칭송하기도 한다. 포옹(정양의 호)이 제천의 이 마을에 와서 하룻밤 머물렀을 때 달이 숲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월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마을의 생김새가 월(月)자를 닮았으니 그 꿈에 설득력을 더한다.

 


아까 말한, 정운태의 할아버지였던 의병 정운호는 제천시로서는 아주 고마운 인물이다. 이 지자체가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는 제천8경의 뼈대를 만들어준 스토리텔러이기 때문이다. 그가 읊은 제천팔경을 보면 그 시적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제1경 임호조수(林湖釣叟, 의림지 호수에서 낚시하는 노인), 제2경 연사귀승(蓮寺歸僧, 제천 감악산에 있던 백련사에 스님이 돌아오는 풍경, 정운태는 '백련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제3경 대암유어(帒巖遊魚 현재의 탁사정(濯斯亭)에서 노니는 물고기), 제4경 난정명탄(瀾亭鳴灘, 관란정에서 물결이 우는 것, 관란정은 물을 바라보는 정지라는 뜻이다), 제5경 벽루추월(碧樓秋月, 한벽루(寒碧樓)의 가을 달빛), 제6경 능강춘범(綾江春帆, 제천의 능강에 봄배 떠다니는 풍경), 제7경 옥순기암(玉筍奇巖, 옥순봉의 기아한 바위), 제8경 월악만풍(月嶽晩楓, 월악산의 늦단풍)이 그것이다. 이 내용은 정운호의 삼종형인 정운경이 남긴 송운집(松雲集)에 전한다. 김기자는 정운호의 호를'화서'라고 했는데, 이 기록은 찾지 못하겠다. 계릉이라는 호를 썼고, 화서(華西) 이항로의 문인이었던 성재 유중교, 그의 제자였던 의암 유인석을 따라 화서학파로 활약한 점은 맞다.

 


청풍호의 끝자락에 있는 정원태 가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집안이 이 땅의 가사문학의 최고봉인 송강 정철 가문이라는 점이다. 파란만장한 정치적 곡절을 겪으면서 말년이 좋지는 않았지만, 빼어난 지식인 문장가임에 틀림없다. 정원태는 송강의 둘째 아들인 정종명(宗溟) 계열이다. 이 분은 강릉부사를 지냈다, 포옹 정양은 바로 정종명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따져보면 이 집의 주인인 정원태는 송강의 14세손이다. 포옹이 포옹하고, 월림의 계산 아래 지은 달덩이같은 집 하나. 송강의 별곡이 흐르는 시(詩)의 월궁(月宮). 그곳에 대한 집요하고 풍성한 상상력만이 '정원태 가옥'을 멋진 스토리의 집으로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책을 뒤적인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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