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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Dec 24. 2015

피의 임진강을 기억함

스토리를 찾아 떠난 여행


임진강은 물살이 빨라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다. 얕은 여울목이나 나루가 아니면 도강(渡江)이 쉽지 않아서 군사적인 방어에는 천혜의 지형이다. 1592년 조선은 이 강을 이용해서 남쪽에서 달려드는 왜구를 막으려 했고, 1951년 한국은 인근의 파평산과 중성산, 감악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북쪽에서 밀려오는 중공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파주와 임진강에 서려있는 이 피의 전투 두 장면을 잊을 순 없다. 절망은 절망 대로, 비극은 비극 대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엄혹한 과거이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으로 가보자. 그해 4월 30일(양력 6월9일) 어둑한 저녁답 임진강엔 비가 퍼부었다. 선조임금은 한양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떠나는 길이었다. 종묘와 사직의 신주판만 들고나선 몽진이었다. 혜음령(현재의 광탄 용미리)을 지나자 빗발이 더욱 세찼다. 궁인들은 우물쭈물 걷는 말 뒤에서 얼굴을 가리며 울었다. 마산역(馬山驛)을 지날 때 밭에서 일하는 백성 하나가 행렬을 보고 통곡했다. “나랏님이 우릴 버렸으니 이제 누구를 믿고 살지요?” 전쟁이 난지 불과 20여일만이었다. 


임진강에서 배로 갈아탔으나 비는 계속 쏟아졌다. 왕은 배 위에서 영의정인 유성룡과 나졸을 불러 갈 길을 걱정했다. 겨우 강을 건너니 벌써 사위가 깜깜해졌다. 강을 건너기 전에 왜적들이 뗏목을 타고 따라올까 두려워하여 남쪽 기슭에 있던 옛 승청(丞廳, 관청. 이곳을 율곡이 시를 읊던 화석정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나 근거가 미약하다.) 건물의 나무를 모두 떼어내어 불에 태웠다. 그 불빛이 환하여 왕이 밤길을 갈 수 있었다. 초경 무렵(저녁 8시) 동파역(파주 진동면 동파리)에 이르렀다. 동파역에서 파주 목사(허진)와 장단 부사(구호연)이 왕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으나 허기 진 호위병들이 주방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먹어버렸다. 당황한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도망쳐버린다. 역사를 기록해야할 사관들은 사초(史草) 서적들을 불 태운 뒤 사라졌고 문무 관료들 중에서 의주까지 왕을 따라온 사람은 열 일곱명 뿐이었다.


“임진강을 사수하라.” 왕은 이렇게 명령했다. 모든 배를 강 북쪽으로 끌어다 놓은 조선군은, 남쪽에서 몰려온 왜군과 열흘 이상 대치하고 있었다. 적은 강을 넘을 계책이 없었다. 그래서 유인책을 쓴다. 우선 조선 정부에 사신을 보낸다. “우리는 다만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 것이니 길만 비켜주시면 됩니다. 강화(講和)를 요청하는 의미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는 나루 남쪽의 강가에 세웠던 막사를 불태우고 척후부대 몇 명만 남기고는 병력을 파주까지 후퇴시킨다. 이런 동정을 파악한 경기감사(권정)가 평양의 임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적군의 기운이 피로하여 도망치려는 징조가 있으니 추격하게 해주십시오.” 당시 임진강 전투를 책임지고 있던 장수는 도원수 김명원이었다. 조정에선 그에게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김명원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선조는 문신인 도순찰사 한응인을 불러서 3천명을 준 뒤 도원수의 말을 듣지 말고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저녁 나절 특공대가 나루에 도착했을 때 한응인은 서둘러 강을 넘으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임진왜란의 위대한 군인 유극량이 나서서 말린다. “내일 적정(敵情)을 살핀 뒤 진격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을 제대로 훈련시켜놓았던 전임자이며 신립의 탄금대전투에서도 문경새재 방어론을 제기했던 전술가이다. 유극량의 이 말에 병사들이 호응한다. 그러자 한응인은 반대 의견을 낸 병사 몇 명의 목을 베고는 다시 도강명령을 내린다. 유극량과 부대원들은 강을 건넜다. 남아있던 적 몇 명을 죽이고는 마치 이긴 듯 환호성을 지를 때 웃통을 벗은 적들이 우루루 뛰어나와 대검을 휘둘렀다. 당황한 아군은 적의 칼에 찔려 죽거나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 무모한 상황에서 사투를 벌였던 유극량도 쓰러지고 말았다. 임진강은 이렇게 뚫렸다. 군사와 전술의 문외한들이 벌인 조선의 초보전투는 왜적의 단순한 속임수도 간파하지 못하고 맥없이 강물에 혈루(血淚)를 섞었다.   


이제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임진강 옆 감악산으로 올라가보자. 1951년 1월 중공군이 밀려왔다. 누런 누비솜옷에 겨울군장을 한 군인이 떼를 지어 가히 바다를 이뤘다는 인해전술에 1.4후퇴가 시작된다. 그러나 3월 15일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이때 유엔군의 맥아더원수가 해임되고 리지웨이장군이 임명되는 지휘체계 변동이 있었다. 그 어수선한 틈을 타서 중국공산군은 병력과 물자를 보강해서 다시 쳐내려왔다. 4월22일 임진강변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인 고랑포축선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그로스터 대대 800명은 중공군 주력인 제63군 3개사단 4만2천명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인다. 5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버틴 나흘은 세계 전쟁사에도 유례없는 영웅적인 투혼이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일곱 번째 격퇴한 대대장 칸(Carne) 중령은 비장한 여단장의 명령을 전하고 있었다. “아군 포병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우리의 후퇴를 엄호해줄 수 없다고 알려왔다. 제군들은 각자 알아서 무사히 후퇴하기를 빈다. 나는 부상자들과 여기 남겠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치 낫으로 풀을 베듯이 무수히 많은 적군을 쓰러뜨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늘어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대대병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로스터 대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50여명에 불과했다.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감악산에서 중공군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도권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해 서울을 지킬 수 수 있었다. 중공군 36개 사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문산-화천의 110km 전선에 소나기처럼 투입해 서울을 쓸어버리겠다던 그들의 대남하작전은 임진강전투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계곡에는 영국군 전적비가 서 있다. 절벽 앞에는 돌이 쌓여있다. 그 돌벽 뒤에는 원래 동굴이 있었다. 4월 전투 때 이곳을 사수하던 군인들은 전사한 동료들을 안치할 겨를이 없어 이 동굴로 실어날랐다. 나중에 이 지역이 다시 수복되었을 때 영국군들은 그 시신들을 수습해갔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의 장한 넋을 기리기 위해 동굴을 막는 돌벽을 올리고 이곳을 전적지로 조성했다. 올 4월18일 영국인 참전용사들이 설마리에서 58주년 기념식을 갖고 한국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3.04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워싱턴 타임스 영국특파원인 앤드루 새먼(43)은 임진강 전투에 참여했던 50여명을 인터뷰하여 금년 4월에 책을 펴냈다. ‘마지막 총알까지(To the Last Round)'라는 제목의 이 저술은 영국인 감독 다니엘 고든(37)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로 탄생한다. 2002년에서 2006년까지 북한 다큐 3부작을 냈던 고든은 ’임진강 전투‘를 조명한 작품을 한국전쟁 60주년인 2010년에 개봉한다.



2003년 9월25일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이란 책이 출간된다. 이 책은 1954년에 영국에서 나온 ‘칼날(The Edge of the Sword)'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는 임진강 전투에 참여했던 호커리 대위의 체험수기가 담겨있다. 이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며 지켜보았고 결국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압록강변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던 사람이다. 그는 일곱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28개월의 억류생활 끝에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했다. 이 책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포로 학대 속에서 폭력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영국을 비롯해, 미국, 남아공, 호주, 터키, 필리핀의 참전용사들의 참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2006년 6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 모르드 멜린(작고)의 부인을 만나 악수를 했다. 멜린은 1950년 당시 벨기에 국방장관이었는데 한국전 파병을 강력히 주장한 뒤 50세의 나이로 장관을 그만 두고 스스로 참전했던 정의의 군인이다. 그는 임진강 전투에 참여했다가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였다. 작년(2008년) 4월엔 85세의 조지 뉴하우스가 방한을 했다. 그도 임진강 전투에 참전했고 4월에 포로가 되어 2년7개월을 보내고 53년 11월에 석방된다. 그는 포로 시절 6개월 동안 집요한 공산주의 세뇌교육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그의 외손녀 제니퍼 프로스트(25)는 삼성장학생으로 연세대 국제법학원에 다니고 있어 한국과의 인연이 깊다. 작년 11월엔 영국에서 글로스터대대의 전투를 기려 나토 연합 신속대응군의 기지 이름을 임진막사(Imjin Barracks)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설마리 235고지에서 피로 아로새긴 전쟁의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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