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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Dec 24. 2015

겸재의 얼굴

인곡유거와 인곡정사

아파트는 집이긴 하지만

얼굴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집이 내부만을 지닐 때,

그곳에 기거하는 인간은

복면을 한 것과 다름없다. 

집이 얼굴을 지닌다는 것,

집이 주인의 얼굴 모양을 닮아가거나

주인의 생각과 그릇과 삶의 모양새를 닮아가는 것,

혹은 집이 주인처럼 소박해지거나 거만해지는 것.

옛사람들은 집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집이 공간으로 표현된 스스로의 개성일 때

인간에 집에 대해 거울 속 자아를 보는 듯한

애착을 느꼈다. 집 떠난 자들이 앓는 많은 향수는

집에 대한 그리움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인곡유거'는

인왕동 골짜기에 있던 자신의 집을

그린 것이다.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객관화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눈 앞에 내놓고

함께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리라.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종로구 옥인동 20번지 부근이다.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자리다. 인곡은

인왕곡(仁王谷)의 준말이다. 당시 이곳의 주소는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이었다.

유거는 외딴 집을 말한다. 당시 인왕곡에

집들이 띄엄띄엄 있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인곡유거에 정선이 살았던 때는 52세부터 84세까지라 한다.

무려 32년을 살았던 곳이다. 



겸재는 원래 경복고가 있는 북악산 서남산 기슭인

창의리 유란동(종로구 청운동 89번지)에서 태어나 살았다.

유란동에는 김창집 형제들이 이웃집에 살고 있었다.

겸재가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창협과 창흡은 조선 성리학의 거장으로

율곡학파 중 낙파의 영수이다. 특히 김창흡은

진경시를 쓰는 종단의 최고봉이었다. 김창업은

그림 이론에 밝은 사대부 화가였다.



겸재가 성리학에 관한 눈을 뜨고 진경산수에 대한

언어적 미감과 회화적 이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이웃을 잘 둔 덕이다. 

겸재는 김창협에게서 진경시를 배운

사천 이병연(1671-1751)과 함께 당시의 진경문화를

주도하게 된다. 이병연 또한 현재 청와대 서쪽 별관이

들어선 궁정동 1번지 자리에서 살았다.

그의 집 이름은 취록헌(翠鹿軒, 푸른 사슴의 집)이었다.

겸재가 1727년 인곡동으로 이사를 갔을 때

그 옆집에는 풍속화의 대가인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이

살고 있었다. 관아재의 부친 형제들은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그 또한 우암의 제자인 이희조의 제자가 된다.

겸재와 관아재는 김창흡 형제들과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한 조선성리학자들로

산수와 풍속으로 진경화단의 쌍벽을 이룬다. 



겸재의 '인곡유거'는 인곡시절 32년 중

비교적 이른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곡정사'를 그린 때가 71세(1746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60세 무렵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인곡유거'와 '인곡정사'가 같은 집을 그린 것이라면

인곡정사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있기 때문이다.   





'인곡유거' 그림에는 널찍한 마당에 큰 두 그루 나무가

눈에 띈다. 하나는 버드나무이며 하나는 오동나무이다.

두 나무들은 마당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앞쪽에 있는 나무들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일 수 있다.



버드나무로 보면 봄철인듯도 하나

오동나무 옆의 작은 나무에서 자란 덩굴식물이

버드나무를 감고 있는 것과 이쪽의 겸재 자신인 듯한

인물이 방문을 열어젖힌 채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여름철인듯도 하다. 왼쪽 아래에는 기와나 담장인듯한 것이

지나가고 있고, 문은 짚이엉을 얹은 소박한 대문이다.  


  



인곡정사는 건물의 전경이 드러나있다.

행낭채가 붙은 솟을대문이 들어서 있고 디귿자 모양의

안채가 있는 집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고

직각의 굽은 담을 친 동향문은 아까 '인곡유거'에서는

지붕만 보이던 것이었다. 돌출한 담장에는 동향으로 선

헛간이 일자 초가로 지어져 있다.



나무들의 배치는 인곡유거와 일치하지 않는다.

10여년 간에 걸친 이 집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럼직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두 개의 다른 집을 놓고 공연히 같은 건물로

꿰맞추는 것이라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겸재는 화첩 한벌을 그려주고 300냥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16간 집 한채 값이 150냥이었으니,

저 건물을 36간 정도로 본다면 그 두 배 정도로

칠 수 있을 것이다. 겸재의 그림값이 집 한 채 값이었다.



수입이 좋았으니 그는 집을 넓히고

증축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유거(幽居)와

정사(精舍)는 둘 다 집을 가리키는 뜻이지만,

정사 쪽이 훨씬 크고 널찍한 집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원래 겸재의 얼굴은 '유거'처럼 소박하고

친자연적이었으나,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권세와 부귀를 누릴 수록, '정사'의 모습으로

권위를 갖춰갔을 것이다. 삶의 양상과

마음의 형국을 저 집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리라.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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