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풍경
어젯밤 그림그리는 후배 L에게서 들은 기이한 얘기.
“형, 근데 있잖아. 우리 집 벽에 야한 작품이 하나 걸려있거든. 제목이 뭐냐면....혜수란(蘭)!”
혜수란? 그게 뭐야?
“후후. 그게 뭐냐면, 김혜수 난초란 뜻이야.”
김혜수 난초라...
자초지종은 이랬다. 노총각인 L은 10년째 사귀는 애인이 하나 있다. 요즘 녀석의 태도로 보자면 결혼 쪽이 아니라 헤어지는 쪽을 궁리하고 있는 기색이다. 강북에 사는 그는 가끔 장흥에 있는 호젓한 모텔을 드나드는데 어느 날 기산저수지 쪽으로 가다가 현수막 하나가 펄럭이는 걸 보았다. <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의 촬영장소>라고 씌어져 있다. ‘바람피기 좋은 날’? 그런 영화가 있었나? 3류 에로영화 제목으로 딱 알맞긴 하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란 게 있었으니 그걸 응큼하게 패러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김혜수가 주연한 것이란다. 김혜수가 이런 걸 찍었나?
호기심이 생겨 L은 모텔 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가파란 산등성이로 굽이치며 오르던 길이 문득 우람한 건물 하나를 뱉어놓는다. 그와 그녀는, 번쩍이는 간판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영화 촬영 장소를 답사하는 호기심으로 유리문을 민다. 프론트의 유리창 구멍으로 내민 얼굴에게 묻는다. “여기 영화 찍은 곳 맞아요? 맞죠? 김혜수가 연기한 방이 어디죠?” 그 말에 안쪽에서는 말없이 키를 내준다.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탄다. 김혜수도 이 열쇠를 만졌을까? 공연히 쇳덩이가 의미심장해지면서 온기가 느껴진다. 열쇠는 5층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객실은 그닥 인상적인 게 없다. 그저 깨끗하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풍경이 괜찮다. 풍경을 틀어놓고 그와 그녀는, 10년 경력의 권태로운 키스를 나눈다. 그녀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동안, L은 텔레비전을 켠다. 놀랍게도 한 연예 프로그램에서 김혜수가 나와서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침대 위로 구겨졌던 자세를 고쳐앉는다. 리모컨으로 소리를 높인다. 그때 문득 시트와 침대 모서리 사이에 끼어있는 치모(恥毛) 하나를 발견한다.
치모야? 체모 아니고?
그는 그때의 감동을 ‘치모’라는 말에 담는다. “형, 그 털을 보는 순간 필이 쫙, 오는 거 있지?” 그의 직감인즉슨, 그게 김혜수의 치모가 틀림없단다. 부끄러운 듯 그러나 도발끼가 느껴지는 털은 나무 이음새에 단단히 끼어 있었다. 김혜수가 연기한 모텔의 수많은 방 중의 하나인 방에서 발견한 치모 하나.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수많은 손님들이 다녀갔을 텐데, 김혜수의 것이 거기 남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어 보인다. 모텔에서 ‘그 기념비적인 방’을 선뜻 내줬을 지도 한번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백번 접어, 설사 거기서 그녀가 연기를 했다 하더라도, 대개 시늉만 하는 것인데, 그 물건이 몸에서 이탈되어 잔류할 가능성이 있겠느냐. 나의 이런 이성적인 지적들은 그의 귀에 전혀 걸려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그의 직감과, ‘우연’이 안내하는 신비한 미로에 대해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눈 앞의 TV 속에선 김혜수가 말하고 있고, 이곳은 김혜수가 다녀간 방이고, 그리고 치모 하나가 남겨져 있다!
형. 상상력에 지진 가는 소리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가만히 들여다 보면 노랗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그 체모는, 그 주인을 이미 풍부하게 암시하고 있는 거야. 그것이 이룬 곡선과 강철같은 분위기도 인격을 함의하는 게 아니겠어? 아무튼 치모를 아주 조심스럽게 발굴해 담아왔어.
이 대목에서 그는 고고학자의 분위기를 낸다. 치모의 손상을 우려하는 표정으로 극도로 신중하게 나무 틈새에서 그 보물을 빼내는 풍경이 떠오른다. 그는 치모를, 삼청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 골방으로 모셔와, 종이에 붙였다. 세필(細筆)을 활용하여 치모의 느낌을 확장하거나 부연하는 선들을 간결하게 그려넣는다. 인위적인 붓질이 털의 원초적 싱싱함과 화려함을 흐리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봄날 풀밭에 알몸으로 누운 여인의 체모를 살며시 건드리는 바람 기운을 화폭에 불어넣는 게 긴요했다.
이른 바 ‘바람피기 좋은 날’의 미술버전이다. 체모는 묵란(墨蘭)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떨고 있는 잎사귀 하나가 된다. 우주와 교합하는 난초의 성감대가 자지러지듯 탄력있는 곡선에 그대로 담겼다. L은 이 작품의 이름을 ‘혜수란(蘭)’이라 붙이고 잘 보이는 벽에 걸었다.
“형. 형이 말만 잘 하면 이 귀한 작품을 형에게 기증할 수도 있어.”
엉?
녀석이 작품을 내게 주겠다는 갸륵한 성의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착각과 환상에 바탕한 이 호들갑스런 작품행위에 내가 놀아나는 상황은 마뜩찮다. 설령 진품이라 하더라도 우스꽝스러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 체모는 ‘바람피기 좋은 어느날’에 황급하게 그 모텔에 들른 50대 배불뚝이 아저씨의 꼬부랑털일 가능성이 더 크다. 탈모 증세에 시달리다 무리 속에 섞여 일탈한 불량한 ‘노모(老毛)’를 벽에 모셔놓고 날마다 눈으로 마주쳐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살짝 구역질이 나는 건 내가 아직 변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방증이 되려나.
야튼, 그 ‘혜수란’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방법은, 유전자 감식이라는 첨단 기술 뿐일 텐데, 누가 거액을 들여 미궁에 빠져있는 ‘치모 미스터리’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L의 '오버‘가 기승을 부려도 나로선 숙연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