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치악산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는 비어 있음이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생을 붙드는 존재들의 뜨거운 숨 고르기다. 해발 1,100미터 높이에 자리한 ‘상원사(上院寺)’로 향하는 길은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 적막했다. 하지만 렌즈 너머로 마주한 치악의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 뜨거웠다.
산객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나뭇가지에 두껍게 맺힌 상고대다. 하늘로 뻗은 가지들은 칼같이 날카로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화려한 얼음 옷을 지어 입었다. 누군가는 이를 '눈꽃'이라 부르며 낭만을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영하의 시간을 견뎌낸 식생들의 ‘생존 기록’이다.
나무 바늘잎 하나하나에 맺힌 결정체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수분을 극도로 아끼며, 오직 생명의 본질만을 남긴 채 버티는 저 강인함. 가장 추운 계절을 가장 뜨겁게 견디고 있는 이들은, 자신을 얼림으로써 오히려 죽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을 가린 전나무 숲이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서 있다. 수직으로 곧게 뻗은 줄기 위로 쌓인 백색의 무게는 나무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자, 봄을 기다리는 경건한 자세다.
가파른 바위 계단을 올라 마주한 상원사의 풍경은 이 모든 고군분투를 묵묵히 지켜보는 어머니의 품 같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는 미망(迷妄) 속 홀연히 나타난 전각들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 신비롭다. 산 아래의 번잡함은 끊긴 지 오래고, 오직 서늘한 풍경소리만이 얼어붙은 공기를 일깨운다.
치악산의 험준한 산세는 상원사에 이르러 비로소 부드러워진다.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전각은 위태로워 보이기보다, 오히려 대지의 기운을 가장 먼저 받은 선구자의 모습이다. 눈 덮인 산사의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온통 하얗게 지워져 있다. 그 지워짐은 ‘상실’이 아니라 ‘비워냄’이다. 제 몸의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겨울을 나는 나무들처럼, 상원사 또한 모든 화려함을 내려놓고 오직 구도의 마음만을 남겨두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눈 덮인 오솔길과 바위틈 사이로 끈질기게 자라난 관목들을 지나며 나는 깨닫는다. 치악의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생명력이 농축되는 시간이라는 것을. 허리가 휘어질 만큼 무거운 눈을 이고도 끝내 부러지지 않는 조릿대처럼, 얼어붙은 바위 틈바구니에서도 치악의 생명들은 결코 숨을 멈추지 않고 맥박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손끝은 시리지만 마음엔 알 수 없는 온기가 차오른다. 가장 척박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자연의 섭리, 그리고 그 거친 생명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은 상원사의 고요함. 이번 겨울, 치악산이 나에게 건넨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생의 겨울을 지나는 이들에게, 지금의 시련은 무너지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단단한 결정체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동토(凍土) 위에 새겨진 저 뜨거운 생의 흔적들을 가슴에 담는다. 나 또한 다가올 나의 계절을 저 나무들처럼 뜨겁게, 저 산사처럼 고요히 견뎌낼 수 있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