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태백의 아침에 서다

by 이창근

1월의 태백산에 서면, 보내야 할 시간과 맞이해야 할 시간이 또렷해진다. 발아래에는 눈 속에 묻힌 지난날들이 조용히 물러나 있고, 능선 너머에서는 막 시작된 하루가 천천히 밝아온다. 겨울의 정점에 선 태백은 혹독한 추위보다 먼저 마음을 비우는 법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려놓지 못한 시간을 품고 이 산을 오르지만, 정상에 다다를 즈음에는 그것을 하나씩 손에서 놓게 된다. 내가 마주한 태백산은 ‘보내줌’과 ‘맞이함’이 이어지는 가장 정직한 아침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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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레 고사목에 머문다. 순백의 상고대를 머리에 이고 선 나무들은 잎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뼈대만 드러내고 있다. 한때는 숲을 이루던 존재지만 지금은 제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겨울을 견딘다. 주어진 몫을 다한 뒤 담담히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단단해 보인다.


이곳에서 떠올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무겁지 않다. 이 말은 끝을 두려워하라는 경고가 아니라, 이제는 내려놓아도 된다는 허락에 가깝다. 태백의 고사목은 삶을 움켜쥐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을 인정한 채 묵묵히 다음 계절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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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 잠겨 있던 숲에 해가 떠오르면 풍경은 단숨에 달라진다. 황금빛 햇살이 설원 위로 번지며 고사목의 빈 가지마다 스며든다. 차갑게 굳어 있던 풍경은 서서히 온기를 띠고, 죽음의 형상처럼 보이던 나무들은 빛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비어 있는 가지들은 그 빛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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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시간을 정직하게 보내준 자리마다 햇살이 머문다. 가지 위에 내려앉은 눈꽃은 사라진 잎 대신 피어난 또 다른 생명의 모습이다. 굽이굽이 휘어진 가지 끝에 걸린 빛줄기는, 끝이 곧 사라짐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한다. 태백의 겨울은 죽음을 말하지만, 그 방식은 놀라울 만큼 차분하고 따뜻하다.


하산길에 접어들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1월의 태백은 겨울의 매서움을 증명하는 산이 아니라, 어제를 보내고 내일을 맞이하는 법을 보여주는 산이다. 고사목에 피었던 눈꽃을 마음에 담은 채, 천천히 산에서 내려간다. 숲길에 들어서니 풍경은 금세 일상적인 높이로 낮아진다. 지나간 시간에 오래 머물지 않기로 한다. 비워낸 자리마다 아침 햇살 같은 새로운 날이 다시 차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의 태백이 알려준 ‘메멘토 모리’를 품은 채, 나는 다시 길 위의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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