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878미터. 대둔산의 높이다. 숫자로만 보면 굳이 ‘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을 다 채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은 높이로 말하지 않는다. 거친 바위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과,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의 깊이로 말할 뿐이다.
대둔산을 오르는 길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기암괴석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찔한 철계단이다. 등 뒤로는 땀이 흐르고, 앞에는 아득한 허공이 열린다.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지는 긴장과 함께 난간에 몸을 맡긴 채 절벽을 오른다.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올라선 끝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단순한 성취감 이상의 것이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멀어지고, 복잡했던 일상의 소음은 발아래 구름 속으로 옅어진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바위 능선 너머로 은하수가 흐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목과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가 서로 맞닿은 풍경을 보노라면, 내 가슴 한구석을 채우던 복잡한 생각들은 어느새 티끌보다 초라해진다. 낮의 산이 도전의 시간을 주었다면, 밤의 산은 경이로운 침묵으로 나를 다독인다. 나는 그 고요한 위로에 이끌리듯, 길을 잃을 때마다 다시 이 산을 찾게 된다.
새벽의 찬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 즈음, 동쪽 지평선 너머로 붉은 기운이 번지기 시작한다. 이내 구름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태양이 솟아오른다. 밤새 웅크렸던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순간,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에도 환한 빛이 스며든다.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땅 위에서 짊어졌던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기 위해서다. 굳이 정상에 닿지 않아도 좋다. 험준한 바위 끝에 펼쳐놓은 풍경과, 그 아래 사계절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산은 제 몫의 치유를 다 하기 때문이다. 산은 그렇게 ‘높이’로는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준다.
대둔산이 내게 묻는다.
“당신의 마음은 오늘 어느 깊이를 품고 있나요?”
오늘 나는 ‘높이’가 아닌 ‘깊이’로, 조금 더 넉넉해진 마음을 안고 하산한다. 산은 높이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로 기억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