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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 영혼 Dec 24. 2022

여행이란 낯선 것들의 연속이다

계획 없이 떠난 제주 여행

제아무리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떠나도 여행이란 낯선 것들과 부딪치는 연속이다. 그러니 여행은 설렘이다. 이번 제주 여행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행복했고 기적처럼 드라마틱함이 펼쳐졌다.

결혼기념일 선물

두 딸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 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었고 아무 계획 없이 3박 4일을 보낼 옷가지만 챙겨 집을 나섰다.


숙소는 제주 여행할 때마다 머물던 곳으로 예약했다. 여행지기와 둘이서 하는 제주 여행은 늘 걷기 여행이다 보니 숙소는 잠만 자고 간단한 조식을 이용하는 게 전부다. 아침에 나서 저녁에 돌아오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고 수건과 생수를 준비해 준다. 가격도 저렴하고 대중교통 이용하기 편리한 곳이라 뚜벅이인 우리에겐 안성맞춤이다. 이제는 동네 골목도 익숙해졌고 제주 갈 때마다 내 집처럼 이용하곤 한다.

설경 속 한라산 둘레길 걷기

겨울 제주 여행이 처음도 아니다. 어느 해인가 폭설로 차량 통행이 마비되어 눈보라 치는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던 경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이나 스패츠 하나 준비하지 않았으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섰다.


그렇게 준비 없이 나서 눈 덮인 한라산 둘레길을 온종일 원 없이 걸을 수 있었던 것도 뜻밖의 행운이었다. 다음날 아침 조식 카페에서 한라산 등반에 나섰던 여행객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날 산행은 버스도 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 아수라장이었다고 했다.


우린 인적 드문 청정 숲길에서 뽀드득뽀드득 하얀 눈 위에 발자국 남기며 한라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품고 돌아왔다. 저녁엔 등잔밑이 어둡다고 늘 이용하는 숙소 바로 앞에 있는 괜찮은 맛집도 처음 이용해 보고 여행의 기쁨을 더했다.

비 오는 날 걷기 좋은 올레코스

다음날 전날 걸었던 한라산 둘레길을 이어서 한번 더 걷고 싶었다. 하지만 눈 예보에 포기했다. 우리가 머무는 서귀포에는 비가 내렸다. 멀리 가지 않고 숙소에서 가까운 올레코스를 걷기로 했다. 전에 걸어보았던 코스 중 5코스를 선택했다.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고 영화 건축학개론의 촬영지인 카페 서현의 집이 바닷가에 있어 느리게 걷으며 즐기기에 좋겠다 싶어서다.

올레 5코스 동백나무 군락지
올레 5코스 바닷가에 있는 영화 건축학 개론 촬영지 카페 서현의 집
시시각각 변했던 날씨 속 빛내림과 셀카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노포 식당

비옷을 입고 나섰다. 바람 많고 변덕 심한 제주 날씨에 걷자면 우산보다 비옷이 편리하다. 남원포구 근처에 이르자 비는 그쳤다.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포구 주변 식당을 벗어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섰다. 조용한 동네를 구경하며 이리저리 다니다가 발견한 곳.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분식집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상호는 분식집인데 순댓국을 파는 곳이었다. 노포 분위기가 물씬하다. 살며시 문을 열었다. 전체 6개 정도의 작은 테이블이 만석이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와 함께 기다렸지만 재료가 떨어져 우리까지밖에 안된다고 해서 그 사람은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리만 들어가자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메뉴는 순대백반과 순대 한 접시가 전부다. 순대 한 접시는 종료되었고 순대백반만 가능하단다. 잠시 후 나온 순댓국이 예사롭지 않다. 국물은 잡내 하나 없이 구수하다. 순대 모양이 달라 여러 종류의 순대가 들어간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막창 부위에 따라 순대 모양이 달랐던 게다.


벽에는 서울에서 소문 듣고 왔어요 등의 메모장과 명함들로 빼곡하다. 2대째 이어오는 30년 된 막창찹쌀순대 전문집이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들어갔는데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다. 영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지만 그날 재료가 소진되면 영업을 마감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운이다.

30년 된 막창찹쌀순대 전문 식당의 순대백반


처음 맛본 접짝뼈국

여행을 하며 부러 맛집 검색을 하고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우연히 알게 되어 더러 색다르게 느껴지면 가보기는 한다. 이번 여행에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곳이 있다. 현지인 맛집이라는데 일단 접짝뼈국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다. 게다가 제주 사람들이 마을 잔치 할 때 즐겨 먹었던 음식이라니 그 맛이 궁금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30분 경이다. 손님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시간에 6~7개 정도 되는 테이블이 다 찼다. 기다렸다 자리에 않으니 주문도 받지 않고 바로 상이 차려진다. 메뉴가 접짝뼈국 한 가지뿐이라서다. 단 한 가지 메뉴로 영업은 하루 4시간만 한다. 걸쭉한 국물이 독특하다. 묵직하고 고소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감칠맛이 날 때 제주어로 "배지근 하다"라고 표현한다는데 딱 그 맛이다. 넉넉하게 먹으라고 처음부터 추가로 한 그릇을 더 내놓는

후한 인심도 특별하다. 갈치젓갈과 상추가 나와서 쌈 싸 먹으니 그 또한 별미다.

기적처럼 탑승한 마지막 비행기

걷기 여행과 먹거리의 즐거움까지 더하며 알차게 보냈다. 다음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런데 전국 폭설 예보다.

비행기 결항이 생길 수도 있고 공항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숙소가 있는 서귀포는 아침에 보슬비가 내리는 수준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서귀포에서 제주공항까지 가려면 예상 소요시간이 1시간 20분이다. 제주 날씨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여 3시간의 여유를 두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서귀포를 벗어나자마자 기상은 거짓말처럼 변했다. 성판악으로 향하는 길은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쳤다. 바닥은 이미 눈이 푹푹 쌓였고 주변엔 버려놓고 간 승용차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눈보라 속 구불구불한 산길에 버스가 굴러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베테랑 버스 기사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사고는 이래서 나는구나 할 정도로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겨우 산길을 벗어나고 제주시로 들어서니 이번엔 차들이 뒤엉켜 버스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공항 상황을 보니 결항이 속속 뜨는데 우리가 탈 비행기는 수속 중으로 뜬다. 이럴 땐 차라리 비행기가 지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버스여 제발 조금만 더 움직여다오를 마음속으로 얼마나 외쳤던가. 그 간절함이 통했을까. 제주시청을 벗어나자 버스는 속도를 내고 공항에 도착했다. 포기할 수 없는 시각. 달렸다. 제주 뉴스를 접한 딸이 걱정되었는지 전날 모바일 보딩패스를 진행해 주었다. 화물로 보낼 짐은 맥가이버 손톱깎이 하나. 화장품 파우치에 들어 있는 걸 모르고 가져갔다. 패스 안되면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보안 검색대에 섰다. 손톱깎이가 걸렸다. 친절한 검색대 직원이 절차를 진행할 시간이 안되니 항공사 직원을 불러 보겠단다. 잠시 후 항공사 직원이 와서 비행기 탑승 마지막 통과 지점까지 함께 이동했다. 그곳에서 김포공항에서 찾을 수 있는 화물텍을 발행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 제주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이륙하는 비행기였다.

 이륙하자마자 앞은 안갯속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비행기에서는 이상한 굉음이 한동안 계속 났다. 기장의 안내 방송도 나오지 않아 가슴이 콩닥 거렸다. 그렇게 한동안 잔뜩 긴장시키더니 흰구름과 파란색 하늘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살았구나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시간 이후 비행기는 모두 결항이다. 강풍과 폭설로 제주 공항은 며칠째 마비 상태다. 버스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놓쳤을 비행기, 우리보다 앞선 비행기도 결항이었는데 그날 마지막 이륙한 비행기를 탔다. 기적처럼 돌아와 돌이켜보니  그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길 위에 서 보아야 마주하고 느낄 수 있는 것들!

낯선 것들로부터 나를 한 뼘 더 성장시켜 주는 게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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