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의 계절
쨍한 해님 얼굴 본 지 오래다. 보슬보슬 소리 없이 연일 이어지는 가을비! '에고 깨알 다 떨어지것네' 막바지 고추 수확도 멈추게 하고 잠시 비가 그친 사이 깨를 베어 눕혀 놓았는데 하늘은 맑은 얼굴을 보여 줄 기미가 없다. 그나마 폭우가 아니라 다행이다.
우리야 특별히 농산물을 판매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그저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우리 먹거리 수확량이 좀 줄겠거니 하면 되지만 대농으로 수익을 올려야 하는 농심은 얼마나 애가 탈까 싶다.
가을 수확으로 한창 분주해야 할 요즘 날씨 덕분에 여유가 생겨 자주 동네 산책을 나선다. 산책 다녀오는 날이면 한 번도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없다. 쌈배추, 미니사과, 무, 양상추 브로콜리 도라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어느 하루는 사과 농장에서 따온 아삭하고 달콤한 미니 사과 맛에 반해서 기쁘고, 또 어느 날은 밭에서 갓 베어온 양상추가 생겼으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신선한 샐러드 만들어 와인 한 잔 하니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다. 쌈배추를 넉넉하게 얻어온 날은 겉절이도 만들어 먹고, 올여름엔 우리 집 놀이터에서도 봄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은 작물들이 풍성하게 열렸다. 그렇게 넘치도록 푸짐한 먹거리 행진은 이렇게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음 넉넉한 부자 된 기분이다. 따로 장 보러 나설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다 거저 받아 오는 건 아니다. 오가며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하고 우리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구슬땀 흘리며 바쁜 일손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웃들과도 자연스럽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지나는 길에 수확하고 있다고 넙죽 받아오기만 했다면 우리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테다.
이런 게 시골살이임을 조금씩 피부로 느끼며 산다.
이제 곧 서리가 내리고 눈 덮인 산골의 하얀 겨울이 코앞이다. 유난히 춥고 겨울이 긴 산골이라 올겨울은 따뜻한 동남아에서 한 달 살기를 준비 중이다. 집을 짓고 이렇게 조금씩 정착해 가는 과정이 있기까지 수고한 우리들 자신에게 주는 위로 여행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