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정리하다
공항에서 집에 도착하니, 벌써 자정이 가까워 있었다. 오랜만에 가장 편안한 공간에 돌아와 씻고, 잠들 준비를 했다. 몸은 분명 피곤했는데, 막상 씻고 나니 잠이 달아나 버렸다.
'위스키나 한 잔 마시고 잘까.'
원래 찾던 위스키가 있었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파는 곳이 없어 비슷한 라인이라며 추천 받아 산 위스키. 최소 식후 세시간 취침을 강박처럼 지키고 살던 나는, 마시면 언제 자야할 지 머릿속에서 시간 계산을 했다. 머릿속 답은 명확했다. 그냥 일단 자고 내일 마시는 것. 하지만 내 마음의 소리는 '여행에서 막 돌아온 지금, 이 새벽에 마시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위스키 병을 따고 첫 잔을 채웠다.
40도의 위스키가 혀에서 식도로 식도에서 위로 넘어가면서 몸 전체가 따뜻해졌다. 원래 찾던 위스키와는 맛이 다르지만 꽤나 매력 있었다. 취기가 오르니 맨정신 때는 외면했던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고 싶어졌다.
진짜로 떠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바로 연상되는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 부모님, 남자친구.
부모님은 확실하게 내게 바라는 모습이 있으시다. 남들처럼 늦지 않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것. 사실 나는 연애사를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말씀드린 적 없었다. 대학생때는 내가 말은 안하지만 연애하는게 아닐까 우려하시더니 지금은 연애하지 않고 있을까봐 노심초사 중이시다. 작년에 어머니가 내 자취방에 들르셨을 때, 나의 생활 패턴과 집을 스캔하신 것 같았다. 그런데 딸이 휴대폰도 잘 안보고 집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어 집에 가자마자 아버지께 "쟤 큰일 났어. 진짜 아무도 없는 것 같애" 하셨다고 한다. 이 정도의 반항에도 반응하시는 부모님인데, 갑자기 프랑스에 간다고 통보하면 얼마나 놀라실까. 또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금전적으로나 심적으로 도움이 되어 드린 적이 있어 내가 떠나게 되면 기존만큼 못해드릴 것 같아 내심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부모님은 모르시지만 사실 3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 남자친구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다정하고 귀엽고 멋있고 생각이 통할 때가 꽤 많다. 1년 반 전 권태를 느꼈을 때, 오히려 어른스럽게 나를 품어주던 그를 보며 '이 남자 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일은 없게 해야지' 다짐했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안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남자가 가장 걸린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떠난다면 정리를 하고 가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맞다.
부모님을 생각하더라도, 남자친구를 생각하더라도
정말, 그래도 가고 싶은가?
(사실 첫 잔을 마실 때까지만 해도 보류 중인 질문이었고 최근 분명해졌다.)
대답은 Ye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