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짐에도 조용하므로
따뜻한 차를 담은 머그잔을 손에 감싸 쥐고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많이 내리는데 소리가 하나 없다.
그래서일까.
겨울 눈은 봄비를 닮았다.
새벽 6시 눈을 감은 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공동현관문을 나서자마자
그나마도 옮겼던 무거운 발걸음을 멈칫.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남부내륙지방에 살면서
오늘과 같은 눈을 본 적이 많지 않다.
처음에는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나온지라
눈앞의 광경에 놀라 나가기를 머뭇거렸다.
어두운 새벽 수상한 사람이 되어보자.
까만 롱 패딩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행여 넘어질세라 신발을 질질 끌다시피 했다.
무심히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그 길에 홀로 남은 발자국은
굼떴던 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조심스럽지만 게으르지 않게.
부지런하지만 넘어지지 않게.
그렇게 외로운 발자국을 꾸욱 남겼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전화가 왔다.
친정 아빠는 운전해서 나서는 길이라고 하셨다.
길이 미끄럽지 않을까 걱정하는 딸의 마음이 무색하게
아빠의 목소리는 사뭇 들떠있었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비는
나무의 뿌리가 물을 채 머금기도 전에
흘러가버린다고 하셨다.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은 찬찬히 녹아
땅이 물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고 하셨다.
아빠는 그렇게 봄을 기다리고 계셨다.
소리소문 없이 내리는 눈은
그래, 봄비를 닮았다.
보슬보슬 뿌리듯 내리는 봄비는
소리를 내기보다 잎을 더욱 푸르게 닦아주고
이내 뿌리를 통하여 잎을 더욱 무성하게 해 준다.
하얀 눈은 세상 모든 빛깔은 하얗게 덮어버려도
푸른 소나무 잎, 그것만은 더욱 푸른빛을 돋보이게 해 준다.
그렇게 가만히 녹아 봄에 힘을 쓸 그들에게
힘을 보태러 뿌리를 향해 땅 속으로 더욱 침잠한다.
고요히 쌓이는 눈은
옳지, 또한 봄비를 닮았다.
봄비가 내리는 날에는 한 없이 설레지 않은가.
곧 분홍꽃이 피겠구나.
메마른 나무들이 목을 좀 축이겠구나.
미동 없는 우물에 돌멩이를 던져 물이 일렁이듯
칠순의 친정아빠 마음이 눈을 보며 요동쳤다.
나의 기억 속에 아빠는
눈이 내리면 출근길을 걱정하며 마음 졸이셨는데
이제는 눈을 보아도 봄을 떠올리실 만큼
마음 한편에 여유공간이 생기신 듯하다.
겨울과 봄이 다르지 않구나.
두 계절이 머금은 물은
겉으로는 달라고 속은 참 깊고 조용하니 닮았구나.
겨울 눈은 봄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