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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틈 Feb 11. 2023

그 물건과 헤어질 결심

수납과 정리사이 아슬아슬 줄타기


"엄마가 버린 것 같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동안 독서노트를 찾아다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더 이상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마침 아이 겨울방학에 맞춰 휴직했고 그와 동시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바로 '정리' 였다.






복직 후 4년만에 다시 휴직 결재를 올렸다. 아이 겨울방학을 내 연차로 틀어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에 둘째의 초등 입학을 앞두고 달리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휴직 결재를 올리고 퇴근하던 날, 집에 오자마자 여기저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처박하둔 물건이 보였다. 마치 자리를 잡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참기 어려웠다. 그렇게 아이들이 잠들면 소매부터 걷어 붙였다. 정리를 하면 할 수록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철 지난 책, 작아진 옷, 더러워진 신발.


'나란 엄마, 일 핑계로 아이들에게 무심했구나.'


한편으론 반갑기도 했다. 이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고 나면 발 딛을 틈 없던 우리집에 공간이라는 것이 생길 수 있겠다 생각했다. 형편도 되지 않으면서 더 큰 평수로 이사를 고민하는 일은 안해도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만의 작은 서재를 겸한 공간도 기대하게 됐다. 그렇게 닥치는대로 버리기 시작했다. 당근 매너온도도 한층 뜨거워졌다. 급기야 이제 한 학년 올라가는 딸이 학교에서 만들어온 것들도 싹 모아 쿨하게 버릴 박스에 던졌다. 아들이 유치원에서 재활용품으로 만들어온 것들도 하나하나 뜯어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텅 빈 아이들 물건 보관함을 보니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 이런게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는 미니멀인가 싶었다.


그런데 올 것이 왔다.



"엄마, 그거 다 버렸어??"

"응, 너 2학년되면 더 좋은 거 많이 만들어 올건데 공간을 미리 마련해두면 좋잖아. 며칠 전시해둔 것도 다른 작품으로 바꾸려고 미리 비워뒀어. 어때? 깔끔하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다 버리면 어떻게 해!! 사진도 미리 못 찍어놨는데!! 엄마 나빠! 엄마꺼도 다 버릴거야!"


자신의 서랍장을 보며 새 물건을 넣은 곳이 없다며 한숨을 쉬기에 이렇게 싹 비우면 좋아할 줄 알았다. 우리 좋자고 한 일이 나만 좋자고 한 일이 되었다. 둘째도 불만이 있었지만 울며 불며 항의하는 아이 앞에 말도 못하고 닭똥같은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아, 이게 아닌데.


솔직히 말하면 물어보기 귀찮았다. 한두 개도 아니고 그동안 쌓인 것들을 일일히 버리니 마니 물어보기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건 버려도 된다고 허락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거기다 예전에 비해 아이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도 늘어갔다. 아이가 둘이니 그 열정 또한 배가 되었다. 제한된 공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열정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머리에 노란 전구가 반짝였다.


이틀 뒤 나는 옷장 속 보물상자를 꺼내왔다. 친정엄마가 주신 나의 어릴 적 돌반지와 은숟가락 그리고 걸음마 신발, 어른이 되어서 열심히 쓴 몇 안되는 일기장 두 권, 외국 생활하면서 기록한 것들 그리고 모아온 엽서 몇 장, 철없는 날의 스티커 사진들, 친구들과 수업시간에 주고받은 쪽지,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 입혀본 배냇저고리와 탯줄 그리고 사진. 손수 뜨개질로 만들어준 아이들 모자와 손발싸개. 하나하나 지금은 구하지 못할 소중한 것들이다. 그리고 내 휴대폰 사진첩의 <보물창고> 앨범까지, 아이들에게 보여줄 준비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다시금 솔직히 이야기했다. 함부로 버려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그리고 안 쓰는 휴대폰 두 대와 함께 '엄마의 꿀팁'을 나눴다. 이 좁은 집에서 나만의 소중한 보물을 살리는 방법 말이다.


나만의 상자에 하나씩 모아두었다 버리게 되는 것들은 사진을 찍어 보관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도 생각보다 쉽게 이해하는 듯했다. 아이들은 자신이 엄마 품에 쏙 들어갈 크기였을 적 물건들을 매 만졌다.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물건들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곧장 자신의 물건을 뒤졌다. 사진을 찍고 상자에 넣기를 반복했다.  






아이의 독서노트는 버려진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누가 버렸는지, 어떻게 버려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는 그 독서노트를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새 독서노트를 받아온 날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욱 소중히 한 자, 한 자 채우고 있다.



정리를 하려면 분명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의미가 담긴 물건이냐에 따라 우리는 그 물건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한다. 오늘 내 손에 들어온 이 물건이 앞으로 나와 어떤 추억을 만들어갈 지 기대가 된다면 휴대폰 앨범에 이것의 사진을 한 장 남겨두자. 잃어버린다면 그 사진 한 장으로 그리움을 달랠 것이고, 정리가 필요하다면 미련없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절대 버릴 수 없다고? 괜찮다. 내가 허락하는 사이즈의 상자에 고이 보관해두면 그만이다.


이 시점에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감히 이 시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내가 그 물건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 물건다만 하나의 물건이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 물건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 물건은 나에게로 와 하나의 추억이 된다.



PS : 아이의 일이라 발행 전 아이에게 먼저 글을 보여줬습니다. 진지하게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아이를 보며 혹여 독서노트 생각에 다시 울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오히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기쁘게 말해주었습니다.


"엄마에게 좋은 글감이 된 것 같아 기뻐!"


이 글을 빌려 아이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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