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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틈 Jan 18. 2023

초등 1학년 독서노트가 없어졌다

어느 운수 좋은 날

"엄마, 내 독서노트 어디갔어?"


초등 1학년 첫 겨울방학. 첫 나들이로 썰매장을 갔다와서 인지 그날따라 일기가 잘 써진다고 했다. 자기 전 양치하다 느닷없이 아이의 이가 빠졌다. 진작부터 흔들리는 이를 엄마에게 말하면 치과부터 데려갈까 싶어 숨겨왔다고 했다. 마음 한결 가벼워 보였다. 기분이 좋은지 내일 학교 도서관에 가서 엄마책도 빌려주겠다며 선심쓰듯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려니 "그래" 단백하게 대답하고 넘겼다. 아이는 진심이었다. 아이의 학교 도서관에서는 독서노트가 일종의 도서관 대출증 같은 역할을 했다. 아이는 내일 챙겨도 될 독서노트를 미리 준비하느라 방을 나섰고, 나는 침대에서 아이에게 잠자리 독서를 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나가볼까 하는데 아이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를 뻔 했다.


"왜? 못 찾았니?"

"응. 방학식 날 집에 와서 쓰고 가방에 넣어 둔 것까지 기억나는데 없어."

"엄마가 가방 빨려고 안에 있는 물건 빼서 책상 아래 책꽂이에 모아뒀는데... 다시 찾아보자."


정말 내가 뒀어야 하는 자리에 독서노트가 없었다. 아이가 푸는 문제집 칸, 교과서가 꽂힌 칸, 자주 읽는 책이 있는 칸.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져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독서노트가 야속했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안방에 누워있던 남편도 스윽 일어나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방에서 뒹굴며 만화책을 보던 막내도 누나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거실로 나왔다. 괜히 자기 책장에 책을 한 권씩 훑어보며 혹시나 독서노트가 껴있지는 않은지 살펴봤다.


"없어, 없다고!! 15권만 더 적으면 200권 채우는건데... 200권 채우면 선생님이 선물주신 댔는데... 없어!!"


아이가 절망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운수 좋은 날의 끝은 왜 항상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것일까.






아이가 입학하고 4월쯤 학교에서 받은 독서노트. 성인 남자 손바닥만한 A5 용지 정도의 크기 였다. 하늘색 겉표지에 <글샘독서> 라고 적혀있었다. 글이 샘 솟는 책 읽기를 위한 작은 노트라니, 멋진 제목이었다. 내지에는 날짜, 책 제목, 지은이와 한줄 생각을 적는 칸이 한쪽에 5개씩 있었다. 등교일마다 한 권씩 부지런히 적으면 딱 한 쪽을 채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아이가 등교하고 처음 하는 일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는 것이었으면 했다. 학교에서 독서노트까지 나눠줬으니 아이에게 권할 수 있는 명분도 생겼다. 1번에서 200번까지, 40주 분량이니 1년 안에 1권을 다 쓰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했다. 학교 수업 시작 전 한권의 책을 읽고 한줄 독서노트를 쓰기로 말이다. 그러면 하교 후 내가 아이가 쓴 글 옆에 하트를 그려주었다. 아이는 한 가지 색깔은 싫다며 꼭 무지개 색깔로 하트를 그려달라고 했다. 월요일은 빨간색, 화요일은 주황색. 대략 금요일에는 보라색이 되도록 말이다.


저녁시간이면 아이는 어김없이 독서노트와 좋아하는 그림책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없다며 투정부리는 날에는 아이가 좋아할만한 책을 직접 골라 가방에 넣어주었다. 책 표지에는 짧은 편지를 적어 붙여주었다. 책의 내용을 묻기도 하고, 아이에게 힘이 될 만한 메세지를 적기도 했다. 그날 아이가 기억해야 할 일이나 당부하는 말도 있었다. 말이 좋아 당부하는 말이지, 아이에게는 그저 귀 따가운 잔소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이는 그 잔소리 마저도 고이 접어 필통에 넣어두었다. 그리곤 쉬는 시간이나 친구랑 다투고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혹은 친구들보다 빨리 과제를 끝내고 멍하니 있다가 나의 쪽지를 읽어본다고 했다.


여름 쯤 아이가 킥보드를 타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오른쪽 쇄골뼈가 부러졌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글을 쓰거나 만들기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을 가장 속상해했다.


"오른손이 어려울 땐 왼손이 돕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완전한 오른손 잡이인 나에게도 버거운 왼손 글쓰기를 아이에게 권하다니. 쉬라고 하지는 못할 망정 독한 엄마였다. 하지만 A가 안되면 B라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후 멈춰있던 독서노트가 다시 아이의 왼손글씨로 한줄 한줄 채워져갔다. 비뚤배뚤 글씨를 볼 때 마다 안타까웠다. 한편으론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처음 한글을 쓸 때 생각도 나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 날은 물통 뚜껑을 덜 닫고 하교를 한 나머지 글샘독서 노트가 모두 젖어버렸다. 노트의 낱장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잘 말라서 다행이었지만 노트는 처음의 매끈한 모습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노트를 사랑했고 1학기처럼 2학기에도 여전히 아이의 한줄 한줄과 나의 무지개 빛 하트로 채워갔다. 그렇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번호는 180번대 어디쯤, 노트가 한장하고 반이 채 남지 않았을 때 였다. 고지가 눈 앞이었다.



PS : 그 아끼던 <글샘독서> 사진이 한장도 없는 것이 비통하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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