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 담임선생님께서는 매주 글쓰기 숙제를 내주신다. 덕분에 아이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작게는 휴일동안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을 일기로 쓰거나 한 주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간단하게 써보게 하면서 다양한 글쓰기를 장려하신다. 얼마 전에는 체험학습을 다녀온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게 하셨다. 마침 동생이 국어에서 설명문 쓰기를 배우는 중이었던 터라 체험했던 것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골라 작동법을 설명하는 글을 쓰게 했다. 숙제가 따로 없는 막내도 누나 글쓰기 걸음마에 발맞춰 만들기 체험한 것을 설명하는 일기를 썼다.
두 남매가 동시에 글을 쓰게 되면 그 모습이 사뭇 어느 교육 다큐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일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늘 육아는 실전이다.) 글의 주제에서 뻗어 나온 잔가지 이야기들이 양쪽에서 내 귀에 꽂힌다. 육아서는 말했다.
긍정적 학습정서를 위해서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세요.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지만 아이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는 시곗바늘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내 역할은 잔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정원사가 되어있다.
그래서 더더욱 오늘의 숙제는 막내가 없는 우리 둘만의 공간에서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번 기회로 아이와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고민이란 무릇 잘못 물어봤다가는 상대의 속마음을 캐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속마음은 파면 팔 수록 더 깊이 숨어버리는 법. 아이가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우리 딸을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막내는 아빠에게 부탁하고 딸 아이 방으로 갔다.
잠자리 대화에서 숙제를 핑계 삼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이 2~3가지 적어보라고 하셨으니까... 3가지는 이야기해 볼까?"
"자꾸 나에게 짜증 내는 친구가 있어. 사실 나 말고 다른 애들한테도 말투가 좀 그래.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생각하는 "걔" 아니야. 맞추려고 하지 마!"
곧 이야기 중간에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밝히고는 푸하하 웃어버리는 아이. 엄마는 못 들은 걸로 하련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일기장에 적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면 선생님도 반 전체에 은근히 예쁜 말 쓰기를 장려하실 수도 있지. 다음 고민은?"
"내가 상상하는 걸 이루고 싶은데 잘 안될 것 같아."
"미리 속단하고 혼자 판단하는 건 좋지 않아. 우선 말해보는 거야. 네가 상상하는 게 뭔데?"
"내가 막 날아가는 거야! 나 과학자가 되어야 하나?"
"얼마 전엔 의사라고 했다가 작가라고 했다가 이젠 과학자야?"
"그럼... 낮에는 의사하고 밤에는 연구하는 과학자 하고 이걸 글로 쓰는 작가! 어때? 멋지지?"
"... 뭐든 크고 많으면 좋은 거라고 치자...^^;"
"마지막은... 음... 근데 엄마는 고민이 뭐야?"
음? 뭐지? 갑자기 훅 들어온다.
나의 고민... 아이의 마지막 고민을 들으려면 무슨 헛소리라도 해서 대화를 이어야 한다!!!
"너희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하는 것. 지금도 10시 다 되어가는데 네가 안 자서 고민이야."
"아! 그런 것 말고!! 진짜 엄마 고민!!"
에라, 들켰다. 어쩌지... 생각이 안 나는데...
아 몰라!!
"엄마는 책을 많이 읽고 싶은데 시간 없는 건 핑계 같고 집중이 잘 안 돼. 점점 책을 잘 못 읽게 되는 것 같아서 좀 걱정돼. 엄마도 폰 중독돼서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나?"
이런, 급한 마음에 말했는데 이 고민은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다. 마음속 깊이 숨겨둔 진심 어린 나의 고. 민.
"엄마는 왜 그런 고민 왜 해? 어른이면 책 안 읽어도 똑똑한 것 아냐?"
"모르는 소리! 어른도 안 하면 까먹는 건 똑같아. 뇌도 안 쓰면 점점 기능이 떨어진다고. 지금부터 열심히 머리를 굴려놔야 너희가 커서 이야기가 좀 통하지 않겠어? 엄마는 이 힘을 믿어. 읽고 쓰는 것의 힘!"
방금 나 좀 멋있었다.
"엄마는 그 힘을 믿어? 그럼 그만큼 엄마가 나도 좀 믿어줘. 나 그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엄마... 나 책도 많이 읽고 운동도 더 잘하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 이게 마지막 고민인가 봐!"
마지막 고민을 듣고 말없이 아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사실 나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3학년 딸아이 스케줄을 좀 바쁘게 짜놓고는 아차하고 있었는데 아이도 그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나 보다. 저녁에 책을 좀 푹 읽고 싶다는 말, 나가서 더 신나게 뛰놀고 싶다는 말을 익히 들었지만 애써 흘려보낸 최근 두 달.
아이의 쉴세 없는 수다에 잔가지를 칠 것이 아니라 아이 일정에 박힌 자잘한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때가 지금이다.
아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아이들의 새근새근 콧소리가 들리우는 지금, 나 홀로 아이의 스케줄표 앞에서 더 긴긴밤을 보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