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식한잔 Sep 23. 2020

존재의 고통[Existential Pain]

철학적 사고

M.S. Escher Drawing Hands

삶은 단조롭다.

1분은 60초이며, 1시간은 60분이고, 하루는 24시간이며, 이러한 하루는 매일 끝없이 반복된다.

하루는 멈춰질 수 없고, 시간의 화살은 앞을 향해 끊임없이 흐른다. 

시간을 멈추는게 가능하다 한들 시간이 멈춰지면 거기에 느낌이나 존재라는 것은 없을 것이며, 시간이 흐르는것은 깨질 수 없는 자연의 본질이다. 

의식이란것은, 구조적인 "계"들의 연결이 시간이 흐름으로 인해서 효과적으로 연결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산물이다.


그리고 시간의 특성 중 하나는 반복성이다. 

흔히 물리학에서 시간을 정의할때 사용되는 개념이 물체의 반복적인 움직임이다. 과거 추를 이용한 시계는, 고정추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하였고,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손목시계든, 실험실의 원자시계든, 모든 것은 다 물질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다.


인간의 존재 본질이 일종의 반복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Loop 이었다는것을 Escher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알았을까?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지만,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지면, 그 나아진 오늘의 상황은 금방 현실의 기점이되고, 어느순간 내가 발전해온것들은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린채, 끊임없이 자기발전을위한 자기발전을 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우주의 엔트로피는 빅뱅이후로 계속 증가하며, 우주가 끝날 때 까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어느 한 계의 무질서도의 증가로 다르게 표현되어질 수 있으며, 무질서도의 증가는, 체계적인 시스템의 파괴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아주 섬세한 시스템이다.

Levels of structural organization

몸은 그 몸에서 각종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기관들은 그 속에서 세부적으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들로 이루어져있고, 이 조직들은 다른 기능들을 하는 세포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며, 세포는 서로 다른 기능을하는 분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아주 섬세하며 체계적인 시스템이 안전하게 작동하기위해서, 우리 몸은 항상성이라는 것을 유지한다. 말자체가 설명하고 있는 개념인 항상성은 항상 어떠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체온은 항상 주어진 온도를 유지한다. 그 이유는 그 온도대를 넘어서면 체내에서 단백질들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이는 우리 신체의 결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또 다른 말로는, '열'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낮은 엔트로피, 균형이 잡히 체계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열을 배출하거나 흡수하며 특정 질서도를 유지하고있고, 이러한 질서도가 깨지는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우주의 전체적인 엔트로피가 충분히 높지 않아서, 우리가 열을 밖으로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엔트로피가 충분히 증가하게 되면, 다른말로 우주가 전체적으로 충분히 뜨거워지게되면, 어떠한 체계적인 시스템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The ultimate heat death라고 부르게 된다.


처음 이 개념을 알게되었을때, 뭔가, 마음속 깊은곳이 푸욱 꺼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옛말중에 이런말이 있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회적동물인 인간은 사회적인 구성원으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담당해낼때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게 영구적인 이름을 남기고, 죽어서도 이름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기억된다는것은,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시간이 흘러서, 내가 아무리 어떠한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무엇인가를 한들 (그러한 무엇인가를 하는게 정말로 힘들다는것은 둘째 치고), 결국 그 정보또한 잊혀질거라는 사실이 무서웠던 것일까?

결국 이러한 질문들의 끝은, 삶은 무엇이고 나는 왜 사는가 등으로 귀결되며, 일종의 Loop을 만들고 그 Loop에 빠져버리는것이 아마 그 공허한 내면을 만들었으리라.

그 공허함은 일종의 무서움이었는데 정말 무거운 무서움이었다. 산행을 하다가 뱀을 봤을때의 무서움이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고층빌딩에 올라갔을때의 무서움같은 본능적이며 생물학적인 무서움과는 약간 다른 차원의 무서움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한 그 순간이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더더욱이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 저기 깊이 숨어있는 어떠한 지식을 찾아서 갈망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정보들을 나날이 습득하며 세상에 대한 이해를 깊이 다져나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정보들은 세상을 오히려 더 아름다운 눈으로 보게함으로써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누구나가 다 이러한 결말을 맞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 사람의 뇌속에 존재의 고통을 느낄 당시에 어떠한 정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재결합되고 새로운 자극을 창조해내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과학과 철학을 좋아해 항상 공부하고 책을 읽어온 나에게는, 그것을 더욱 공부함으로써 죽음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된것이다.


전에 썻던 글에서 했던 말처럼, 죽음을 마주하고 그 개념에 대해 깊이 명상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나도 큰 영향력을 선사한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자주 존재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이 가끔은 버겁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속되며 그러한 고통을 더 나은 생각과 관점으로 발달시키는 기술을 점점 개발중이다. 요즘에는, 시간과 존재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언어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언어라는 추상적인 이미지 전달 매개체를 통해 특정 이미지를 효율적을 전달하는 행위 또한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유희 중 하나이므로, 나의 삶은 공허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므로 더욱 깊은 유희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심오한 Loop은 이것이다. 

나의 삶이 여기에 정착하기 까지에 나의 자율적인 선택은 얼마였을까?


바쁜 하루를 살며 자율주행 모드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속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저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셜 딜레마[Social Dilemm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