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대지 위에 서 있다. 1900년대 덮개도 없는 무개형 비행기를 탄 조종사들이 바라본 대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야성의 부름을 따라 계급도, 물질도, 외부의 조건을 의식하지 않는 비행의 세계 속에서 참자유와 인간애를 맛본 자들이었다. 생택쥐베리는 자신의 신념대로 그곳을 찾아갔고 끝내 어린 왕자처럼 별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죽음을 항상 목전에 둔 사람이었다. 동료들이 10분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곧 생사기로를 의미했다. 영웅처럼 위엄 있게 살아 돌아온 자들에게 듣는 인상적인 모습이 가슴 깊이 묻어졌다. 나도 그런 상황을 맞으면 동료처럼 죽어가리라. 40도 추위 속에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안데스 산맥에서, 리비아 사막에서 그들은 발, 무뤂,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은 타들어가는 육체를 고스란히 견뎌내며 여기서 그만두고 싶은 유혹, 그리하여 눈만 감으면 평온해질 수 있는 그 순간에 그들은 누구를 떠올렸는가.
내가 우는 것이 나 때문인 줄 아나?
아내는 내가 살아있다면 걸을 거라고 믿겠지. 동료들도 내가 걸을 거라고 믿을 거야.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으켜준 삶에 대한 책임감. 또한 극한의 순간에 나 자신이 운명이 되어 충만함과 따스함과 해방감과 평온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어떻게 하면 죽음을 그리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을 자꾸 생각하면 친밀해지고 닮아간다던데. 죽음을 자주 생각하는 사람은 두 팔을 벌려 환하게 맞이할 수 있으리라.
그는 계속 삶의 진정한 가치를 묻는다.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증이 있다면 대립한다는 뜻이고 그건 곧 분열을 의미한다. 보편성을 의미하는 언어로 표현되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리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면 진리가 아니라 더 좋은 생각일 뿐이다. 그가 추구한 이상적 진리는 ‘사랑’이었다. 동정도 연민도, 고마움도 의미를 상실한 관계의 높이. 바로 그곳에서 인간은 해방된다. 나는 이러한 관계를 단 한 명에게 경험하고 있다. 그가 아픈 대로, 기쁜 대로 나도 느끼고, 그의 삶이 내 삶과 겹쳐져 함께 호흡한다. 곁에 있지 않아도 일체감을 경험하고, 건설과 완성과 마지막 다다를 길을 짚어본다. 내가 볼 때 생택쥐베리는 이러한 인간애를 받아들였다기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전쟁 중에, 비행 중에 잃어야 했을 동료들의 죽음을 비장하고 숙명적으로, 의연하고도 책임을 다한 이상적 모습으로 그려낸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잠든 채로 살아간다.”
그의 괴로움은 인간만이 대지의 장애물을 극복하여 모차르트 같이 연주할 수 있는데, 그저 순응하는 대로, 기계에 눌려 판에 박힌 모양대로, 불질적 부를 찾아 스스로 감옥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더욱 괴로운 것은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결국 안주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간만의 매력이 사라지고 흉하게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이 서글프다. 엄청난 속도를 내는 과학기술 발전과 숨 가쁜 자본에 대한 추구, 자기 성장과 계발로 목마른 시대에 생택쥐베리가 강조한 인간의 순수한 사랑은 여전히 울림이 큰 진리다. 그래서 나는 이상주의자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