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중나무고치나방

귀여운 얼굴 양옆에 펼쳐진 섬뜩한 위장술

by Eco archivist

곤충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최대종'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된다. 문헌이나 사진으로만 상상하던 그 압도적인 크기의 생명체와 실제로 조우했을 때 느껴지는 원초적인 경이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늦은 밤, 어두운 숲길을 걷다 보면 이따금 커다란 새나 박쥐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숨을 죽이고 랜턴 불빛을 향해 날아든 그 거대한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오랫동안 숲을 누비며 품어왔던 동경은 마침내 현실이 된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만남의 주인공은 양 날개를 활짝 편 길이 15cm에 육박하는 사실상 국내 최대 크기의 나방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가중나무고치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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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중나무고치나방


이 거대한 나방의 시작인 알은 훗날의 덩치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작지만, 알을 깨고 나온 애벌레는 놀라운 먹성으로 숲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자라난다.

황벽나무, 산초, 초피나무를 비롯해 수변의 버드나무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한 식초를 탐식하며 어른 손가락보다 굵고 거대하게 자라난 애벌레는 그 독특한 색감만으로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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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중나무고치나방 알과 애벌레


애벌레의 꼬리 부분 생김새가 마치 또 다른 머리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데, 이는 포식자로 하여금 머리와 꼬리를 헷갈리게 만들어 치명적인 공격을 피하는 훌륭한 방어술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몸 곳곳에 돋아난 육질의 돌기 주변으로는 소위 '왁스타래'라고 불리는 하얀 물질이 천천히 형성되어 몸을 덮는다.

마치 흰 가루처럼 묻어나는 이 왁스 물질은 개미를 비롯한 육식성 천적들이 매우 기피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커다란 덩치 탓에 눈에 띄기 쉬운 불리함을 가짜 머리와 정교한 화학적 방어막을 통해 치밀하게 극복해 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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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중나무고치나방 애벌레의 가짜머리(左)와 왁스타래(右)


먹이 활동을 마친 애벌레는 나뭇잎을 둥글게 말고 그 안에서 비바람을 견뎌낼 무척이나 질기고 단단한 고치를 짓는다. 참나무산누에나방, 유리산누에나방 등 대다수의 산누에나방과 나방들은 늦은 가을에 우화하여 생을 마감하기 때문에 겨울 숲에서 눈에 띄는 고치들은 십중팔구 이미 주인이 떠난 빈 껍데기다.

반면 가중나무고치나방은 번데기 상태로 고치 속에서 추운 겨울을 온전히 버텨낸다. 나뭇잎과 엮여 있는 데다 위장술이 뛰어나 앙상한 겨울 가지 사이에서 고치를 찾아내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지만, 운 좋게 속이 꽉 찬 고치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온다면 이듬해 봄 경이로운 생명의 탄생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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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중나무고치나방의 고치, 고치를 고정시킨 강력한 실


기나긴 겨울을 견디고 마침내 우화한 성충의 모습은 압도적인 위용과 함께 묘한 반전 매력을 선사한다.

15cm에 육박하는 웅장한 날개 면적에 비해, 머리와 가슴, 배로 이어지는 실제 몸통은 놀라울 만큼 앙증맞고 작기 때문이다.

촘촘하고 부드러운 털로 뒤덮인 조그만 몸통에 거대한 날개를 단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숲 속을 빼꼼히 내다보는 귀여운 하늘다람쥐가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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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토록 사랑스럽고 순둥순둥한 얼굴 양옆으로는 천적을 기만하는 전략이 숨겨져 있다. 이들의 넓은 날개는 단순한 비행 도구를 넘어 천적을 속이는 거대한 캔버스나 다름없다. 양쪽 앞날개의 맨 끝부분을 들여다보면, 노란 눈을 번뜩이며 입을 반쯤 벌린 뱀의 측면 두상과 닮은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어두운 숲 속에서 천적인 새들이 접근할 때 이 나방이 거대한 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펄럭이는 행동은, 마치 두 마리의 독사가 살기를 띠고 덤벼드는 듯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켜 포식자를 단번에 혼란에 빠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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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무늬에 뱀을 의태한 가중나무고치나방


앙증맞은 하늘다람쥐의 얼굴과 뱀의 눈을 동시에 품고 밤의 숲을 누비는 이들의 삶은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짧다. 성충이 됨과 동시에 입이 완전히 퇴화해 버리는 탓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오직 번식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며칠간의 비행으로 생을 마감한다. 짧고 강렬했던 비행이 끝나고 숲에 남겨진 거대한 날개는 이내 흙으로 돌아가지만, 이들이 보여준 치열하고도 경이로운 생존의 기록은 오래도록 남는다. 한반도의 밤 생태계가 품고 있는 가장 거대하고 매력적인 피조물, 가중나무고치나방이 숲에 남기는 묵직한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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