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사귀를 따라 올라온 푸른 날개의 기록
숲을 다니다 보면 기후 위기라는 막연한 단어가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 있다. 예전 같으면 남도 끝자락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나도밤나무과 나무들이 이제는 우리 마을 숲에서도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때가 그렇다.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나무가 올라오니, 그 잎을 먹고사는 나비들의 지도 또한 다시 그려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밤나무와 합다리나무는 남부 지방의 전유물과 같았다. 하지만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이들의 북상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이제는 충청권 내륙은 물론, 해안선을 따라 경기도권까지 서식지가 넓어졌다. 나무가 길을 터주자 내가 사랑하는 먹그림나비와 푸른큰수리팔랑나비도 그 길을 따라 함께 올라왔다.
숲의 위도(緯度)가 바뀌면서,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중부 지방의 숲에서도 녀석들의 은밀한 식흔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나비들의 흔적을 찾으려면 먼저 나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숲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합다리나무는 시원스러운 잎 모양 때문에 가죽나무나 옻나무와 혼동하기 딱 좋다.
가죽나무는 잎 밑부분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돌기(선점)가 있고, 옻나무는 독성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반면 합다리나무는 잎의 가장자리가 매끈하고 단정하다.
나도밤나무는 이름 때문에 밤나무나 물참나무와 헷갈리기 쉽지만, 사실 밤나무와는 가문부터 다른 남남이다. 밤나무 잎은 가장자리 톱니 끝에 예리한 하얀 침이 돋아 있지만, 나도밤나무는 마치 누군가 자를 대고 빗금을 그어놓은 듯한 규칙적이고 선명한 잎맥이 잎 가장자리 끝까지 시원하게 뻗어 있다.
이 강인한 잎맥의 선이야말로 나도밤나무를 식별하는 최고의 열쇠다.
이 나무들을 구별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잎사귀에 새겨진 비밀스러운 식흔을 읽어낼 수 있다.
잎의 주맥만 남기고 양옆을 갉아먹은 뒤 남은 잎을 붙여 길게 연장해 만든 먹그림나비의 '외줄 길', 그리고 합다리나무 잎을 둥글게 돌돌 말아 만든 푸른큰수리팔랑나비의 '은신처'. 남들에겐 그저 상처 난 잎사귀일 뿐이겠지만, 내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의 요람이다.
흔히들 나비의 화려한 날개에만 시선을 뺏기지만, 사실 나를 진짜 미소 짓게 하는 것은 잎사귀에서 마주하는 애벌레들의 독보적인 개성 때문이다.
먹그림나비 애벌레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 기이하고도 강렬한 외형에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머리 위로 솟구친 우람한 뿔은 마치 고대 신화 속 괴수나 전설 속 사슴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당당하다.
우리나라에 사는 수많은 나비 애벌레 중에서도 이토록 카리스마 넘치는 '뿔'을 가진 녀석이 또 있을까. 그 위엄 있는 자태는, 숲 속의 작은 수행자를 넘어 한 명의 장수를 마주한 듯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푸른큰수리팔랑나비 애벌레의 미감(美感) 또한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잎을 말아 만든 요새 안에서 만나는 녀석의 몸체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독특하고 신비로운 색감을 지니고 있다.
흔한 초록색 애벌레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 오묘하고 세련된 색감은 볼 때마다 "어떻게 자연이 이런 색을 빚어냈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이 두 친구의 애벌레는 우리나라 나비들 중에서도 단연 손꼽을 정도로 멋지며, 기록가인 내게는 그 어떤 화려한 성충보다도 더 큰 시각적 전율을 선사한다.
이 멋진 애벌레들도 결국 성충이 되었을 때 보여주는 그 찬란한 완성도 앞에서는 조연이 되고 만다.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날개를 펼친 녀석들의 모습은, 사실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을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먹그림나비의 날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군가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정성스레 쳐 내려간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하얀 바탕 위에 번지듯 그려진 검은 무늬는 절제된 동양미의 정수를 보여준다.
화려한 원색 없이도 숲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그 고혹적인 자태는, 과연 '먹그림'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최고의 걸작이다.
하지만 색채의 절정은 단연 푸른큰수리팔랑나비의 몫이다. 숲의 어둠을 뚫고 날아오를 때 언뜻 비치는 그 독보적인 푸른빛은 세상 그 어떤 물감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깊이를 지녔다.
특히 녀석이 날아오를 때 살며시 드러나는 속 날개의 환상적인 색감은 관찰자의 숨을 멎게 한다.
이 나비들을 만나는 일은 내게 언제나 커다란 즐거움이다. 매년 나비들을 찾아 숲 속에서 잎들을 살피며 이들이 남긴 단서를 읽는다.
남부의 따뜻한 공기를 품고 북상한 나무들, 그리고 그 뒤를 쫓아 올라온 푸른 날개의 나비들. 이들의 이동 경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숲이 겪고 있는 변화의 생생한 기록이다.
어쩌면 이들이 전하는 암호는 우리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른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반가움 너머로, 빠르게 뜨거워지는 지구의 숨 가쁜 맥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록을 멈출 수 없다. 나무가 길을 내고 나비가 그 뒤를 쫓는 이 치열한 삶의 지도를 기록하는 일은, 변화하는 숲의 시간을 박제하고 그들의 내일을 응원하는 나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 같은 겨울날이면, 나는 역설적으로 따뜻함이 넘치는 숲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올해 다시 찾을 숲에서도 녀석들이 건네는 또 다른 비밀 편지를 읽을 수 있기를.
더 짙어진 푸른 날갯짓으로 우리 숲의 안녕을 확인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