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대 숲의 은밀한 평행이론

알려지지 않은 포식자와 진딧물 병정의 반격

by Eco archivist

나비 애벌레를 평화로운 초식주의자로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고정관념이다. 햇살 아래 부드러운 초록 잎을 느긋하게 갉아먹는 '배고픈 애벌레'의 이미지는 익숙하지만, 생태라는 거대한 지도 안에는 파릇한 잎 대신 사냥의 본능을 선택한 은밀한 포식자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육식 나비'라고 하면 대개는 바둑돌부전나비를 떠올린다. 조릿대 숲 속에서 은밀하게 날아다니는 이 나비는, 사실 애벌레 시절 일본납작진딧물을 주식으로 삼는 냉혹한 사냥꾼이다.

GJH_3214.jpg
GJH_0033 바둑돌부전나비 애벌레 섭식.jpg
바둑돌부전나비 애벌레


하지만 그 유명세의 그늘에 가려져 우리가 미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붉은꼬마꼭지나방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성충의 모습만 기록될 뿐, 이 나방 애벌레의 생태에 대해서는 외국 자료에서 가져온 "진딧물을 섭식한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었다. 2022년 군산의 신이대 숲에서 마주한 붉은꼬마꼭지나방의 애벌레는 바둑돌부전나비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같은 신이대 숲에서 같은 진딧물을 사냥하고, 심지어 입에서 실을 내어 자신만의 은밀한 은신처를 짓는 기술까지도 평행이론처럼 공유하고 있었다.

GZ0_2435.jpg
GZ0_2449.jpg
붉은꼬마꼭지나방 애벌레


재미있는 사실은, 먹잇감이 되는 진딧물들 역시 순순히 제 몸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의 연구는 이들의 관계를 단순한 포식을 넘어선 '군비 경쟁'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진딧물 군집은 포식자의 위협에 맞서 방어에 특화된 '병정(Soldier)' 계급을 만들어낸다. 바둑돌부전나비 애벌레와 같은 포식자가 많은 지역의 진딧물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뿔이 더 길고 앞다리가 굵게 발달한 병정들을 전방에 배치한다.

이 병정들은 포식자가 나타나면 굵은 앞다리로 적의 몸을 꽉 붙잡고 날카로운 뿔로 찔러 공격하며 군집을 지켜낸다. 실제로 포식 압력이 높은 환경일수록 진딧물 병정들의 방어 능력과 공격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바둑돌부전나비와 붉은꼬마꼭지나방 애벌레가 신이대 잎사귀 뒷면에 실을 내어 은신할 집을 짓는 습성은, 어쩌면 이 '병정 진딧물'들의 집단 반격을 막아내기 위한 수단 일지도 모른다.

병정들이 뿔을 치켜들고 성벽을 쌓는 삼엄한 경계 속에서, 두 포식자는 실로 만든 방막 뒤에 몸을 숨긴 채 은밀한 사냥을 이어간다.

성충이 되어서는 한쪽은 나비로, 다른 한쪽은 나방으로 각자의 길을 가지만, 가장 성장이 절실했던 시기만큼은 살아남기 위해 똑같은 '사냥의 기술'을 연마한 셈이다.

GJH_3189.jpg
GZ0_2443.jpg
바둑돌부전나비 애벌레 집(左), 붉은꼬마꼭지나방 애벌레 집(右)


바둑돌부전나비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숲의 이면에는 아직 우리가 읽어내지 못한 방대한 서사가 숨어 있다. 붉은꼬마꼭지나방처럼 이름조차 생소한 존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이대 잎 뒷면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치열하게 생을 지탱한다.

앞으로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풍경 속에서 이 은밀한 생의 기록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숲의 지도를 채워나가는 일을 지속하려 한다.

G78_2788.jpg
GJH_9228 붉은꼬마꼭지나방.jpg
바둑돌부전나비(左), 붉은꼬마꼭지나방(右)


작가의 이전글숲의 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