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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냥이 Jan 19. 2023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해

퇴촌 독립서점 <서행구간>


서행구간 (2023.1)-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596



1월 첫째 주까지 반드시 마감해야 하는 작업이 있었다.

시간이 워낙 촉박했고 양이 많은 작업이었는데 아이들 방학과 겹쳐서 작업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병원 입원 같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양가에 긴 시간 맡겨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아이들을 친정으로 보냈다. 총 5박 6일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일주일 치 학원 보강이 두려웠지만, 마감 날짜를 맞추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들 끼니 걱정으로부터 해방이라니, 학원 라이딩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나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온전히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너덜너덜해진 손목에 파스를 붙여가며 작업했지만, 행복했다.

시안을 넘기고 나니 이제 아이들을 데려와야 하는 주말이 되어버렸고, 나에겐 딱 반나절의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정말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은 소중한 반나절이었다.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생각해본다.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경기도 광주 퇴촌에 위치한 독립서점 “서행구간”이었다.

2020년 여름, 일본으로 곧 이민을 가는 첫째 친구네와 천진암 계곡에 숙소를 잡고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때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처음 그 “서행구간”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매년 여름이면 그 근처를 한번은 지나간다. 여름이라서, 유원지 근처라서, 계곡이 있어서가 그 이유다.

작년 여름에도 천진암 근처에 숙소를 잡고, 근처에서 가장 큰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지나가는 길에 그 서점을 보았다. 그곳이 서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야외 수영장 딸린 숙소에 어서 도착해서 아이들을 풀어놓는 것이 더 시급했기에 들어갈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또 그냥 지나쳤다.

독립서점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가끔 생각이 났으나 일부러 가게 되지 않아 2년은 맘속에 담아두었던 곳이었는데, 아이들을 찾으러 가기 전 딱 반나절의 시간 동안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를 처음으로 여름이 아닌 겨울에 오게 되었다.

어제 내린 함박눈이 이곳엔 조금 더 내린 것 같다.

건물엔 주차할 곳이 없어 근처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서행구간’으로 들어가는 보라색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선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대표님인 것 같은 분은 한쪽 테이블에서 다른 분들과 대화 중이셨고 동행해준 남편과 나는 맘 편히 서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얼마 전 서행구간에서 발행한 에세이집 <서행구간에 들어왔습니다>를 구입 후 자리에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편안하고 아늑했다. 30~40분쯤 머물렀을까?

이 서점이 주는 안정감에 매료된 나는 사장님께 여기를 그려도 될지 허락을 구하기 위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서점이 참 이뻐서 그리고 싶다는 이야기만 전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대표님의 밝은 기운에 이끌려 덥석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점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행구간과 서행구간에 오는 이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감동이었다. 대표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두 쓸 수는 없지만, 뒤에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극 I 내향인인 내가 처음 보는 사람과 1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시계 한번 보지 않고 서점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분명 이 서점엔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우선 서점과 작업 공간의 비율이 안정적이고, 서점의 크기도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였다. 책의 종류도 다양하고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적당했으며, 다양한 연령대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뭐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가장 중요한 건 대표님이 가진 에너지였다.

전혀 서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곳이었다.

상상치도 못한 장소에 생긴 서점을 두고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동네 주민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했던 분들이 이젠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신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6시 30분이면 문을 여는 대표님의 마음에 동네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움직였을 터다. 새벽부터 불을 밝혀 동네 주민들의 빛이 되어주고, 소외된 청소년들에게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고, 어른들의 아픈 마음도 위로해주며, 흔들리지 않고 이 곳을 지켜내시는 대표님의 에너지와 내공이 정말 대단하다 느껴졌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서행구간>의 대표님을 만난 날 온종일 마음이 벅찼던 것은 진짜 ‘어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도 길을 잃지 않도록 불을 밝혀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 삶이 남들과 조금 달라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도 되지 않을까 믿음을 주는 사람.

어쩐지,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도 되지 않을까?

용기가 생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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