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이, 프로듀서 시대를 연 디제이 소울스케이프의 1집
힙합은 주객전도의 상황에서 탄생했다. 1970년대 초반 한 디제이에 의해 두 장의 동일한 엘피판으로 같은 노래의 특정 구간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방식이 만들어졌다. 이 기술이 디제이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디제이들은 흥을 돋울 목적으로 지인을 불러 공연 사이사이에 구호를 외치게 했다. 하지만 디제이 옆에서 이따금 소리를 지르던 이의 비중이 시나브로 늘면서 디제이보다 이들이 더 주목받게 됐다. 얼마 뒤 디제이의 도우미들은 래퍼라는 칭호를 얻으며 음반을 취입하는 기회를 얻었다. 힙합은 이렇게 시작됐다.
디제이들이 힙합의 밑바탕을 다졌으며, 노래들의 반주를 주도해서 제작함에도 대다수 음악 팬의 관심은 래퍼에게 쏠렸다. 80년대 중반부터 디제이들의 기량을 겨루는 세계 대회가 열렸지만 자기 작품, 단독 무대를 갖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기에는 부족했다.
이에 90년대 중반 들어 몇몇 디제이들은 턴테이블 위의 레코드판을 앞뒤로 움직여 신기한 소리를 내거나 기존하는 작품들을 짜깁기해 기묘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음반을 선보였다. 턴테이블과 믹서를 활용해 색다른 음악을 들려주는 '턴테이블리즘'의 개막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디제이들은 힙합의 전통 작법에 따라 지은 곡들을 장만하거나 자신이 만든 반주에 동료 래퍼의 목소리를 입힌 음반을 출품하곤 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두 동향 모두 디제이가 주인공으로 나섰다는 점이 공통된다.
2000년 10월 출시된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의 데뷔 앨범 [180g Beats]는 두 양상을 아우른 국내 최초의 작품이었다. 소울스케이프는 여기에서 연주자, 제조가, 감독자 역할을 두루 수행했다. 턴테이블 스크래칭, 샘플링으로 이룬 비트, 래퍼들의 찬조가 함께 나타났다. 디제이 김민상이 같은 해 몇 달 앞서 발표한 [Hip Hop Nation] 앨범으로 우리나라에서 디제이가 중심이 되는 첫 순간을 장식했으나 [힙합 네이션]은 댄서들을 위한 비트 모음집 성격이 짙었다.
힙합을 뿌리로 두니 힙합의 으뜸 특징인 묵직한 드럼 소리가 전반에 자리하지만 [180그램 비츠]의 수록곡들은 조금도 까다롭지 않다. 턴테이블리즘 분야에 속한 디제이들이 대체로 복잡하고 난해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반면, 소울스케이프는 고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 오르간, 현악기 샘플을 엮어 듣기 편안한 기악곡을 완성했다. 이따금 흐르는 턴테이블 연주로 곡들은 생동감도 내보였다.
순전히 연주 음악으로만 채웠다면 다소 밋밋했을 것이다. 그 약점을 엠시 메타, 리오 케이코아, 엠시 성천 등 동료 래퍼들과의 협업으로 보완했다. 음색, 플로, 가사 내용이 각기 다른 다섯 래퍼의 참여 덕에 앨범은 한층 다채로워질 수 있었다. 랩을 제외해도 소울스케이프가 재즈, 블루스 록 등의 여러 지반을 준비해 다양성은 이미 충족된 상태였다.
이 앨범이 나온 이후 디제이 손, 디제이 웨건, 버스트 디스를 비롯한 디제이들과 페니, 더콰이엇, 랍티미스트 같은 프로듀서들이 속속 음반을 발표했다. 소울스케이프가 우리나라에서 턴테이블리즘과 힙합 프로듀서의 시대를 연 것이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180그램 비츠’는 역사적 가치와 탁월한 음악적 완성도를 겸비해 여전히 광채를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