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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Feb 04. 2022

실패가 낳은 대한민국 대표 응원가

무한궤도 '그대에게'

스승으로 모시는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는 1990년대 가요계를 '3S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 '스리 에스'는 신승훈, 서태지, 신해철을 일컫는다. 신승훈은 애절한 노래를 만드는 작사, 작곡 능력, 미성과 애수 짙은 가창력을 두루 갖춰 발라드 영역에서 개가를 올렸다. 서태지는 세련된 사운드와 역동적인 춤을 동반한 데뷔곡 ‘난 알아요’로 댄스음악 신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신해철은 철학적인 내용의 가사, 독자성 강한 스타일로 록의 성장을 도모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번영을 이끈 세 거장의 자취는 90년대에 깊게 새겨져 있다.


이들 중 신해철은 음악적으로 가장 다채로웠다. 솔로 시절에는 발라드와 댄스음악을 주되게 들려줬으며, 밴드 넥스트(N.EX.T)를 결성하고 나서는 국악과 록의 퓨전, 복잡한 구성이 특징인 프로그레시브 록, 하드록, 포크 록 등 록의 여러 양식을 누볐다. 윤상과 의기투합한 노땐스(nodance), 크롬(Crom)이라는 예명을 쓴 솔로 활동, 영국의 오디오 엔지니어 겸 프로듀서 크리스 샹그리디(Chris Tsangarides)와 결성한 모노크롬(Monocrom)으로는 전자음악을 파고들었다. 그런가 하면 2007년에는 빅 밴드 재즈 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화려한 빛깔을 뽐낸다.

각각 '나에게 쓰는 편지'와 '도시인'이 실린 신해철의 2집과 넥스트의 1집.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면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 온 역사도 훌륭하지만 깊은 사색이 깃든 노랫말도 신해철과 그의 음악을 특별하게 느껴지게끔 했다. 불투명한 앞날을 걱정하는 청춘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나에게 쓰는 편지', 속도와 성과를 중시하고 개인주의가 가속화되는 현대사회의 삭막함을 노래한 '도시인',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배척하고 진정한 자신을 탐구하는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 황금만능주의의 만연을 지적한 'Money' 등 그의 노래들은 거의 항상 날카로운 통찰, 묵직한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신해철은 음악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공유하고 사회를 비평했다.


이 비범한 인물은 1988년 열린 MBC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의 리드 싱어로 대중과 처음 만났다. 본선에 진출한 16개 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른 무한궤도는 이전 참가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신선한 음악으로 단번에 관중과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무한궤도의 노래 '그대에게'는 행진곡을 떠올리게 하는 신시사이저 연주를 앞세워 초반부터 웅장함을 나타냈다. 몇 초 뒤 속도를 올려 빠르게 나아갈 때에는 신해철의 후련한 보컬 애드리브로 상쾌함을 더했다. 마무리는 발라드풍으로 꾸며서 독특함도 갖췄다. 무한궤도는 신해철이 만든 '그대에게'로 그날 대상을 거머쥐었다.

MBC <대학가요제>에서 무대 전 사회자와 인터뷰를 나누는 모습과 무한궤도의 데뷔 앨범.

신해철에게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은 설욕의 승리라 할 만했다. 신해철은 같은 해 여름 아기천사라는 그룹으로 MBC <강변가요제>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최종 예선에서 떨어지며 고배를 맛보고 만다. 신해철이 작사하고, 원경이 작곡한 록 발라드 '기다림은 사랑의 시작이야'는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충분히 흔들지 못했다.


이후 <대학가요제> 참가 지원서를 제출한 신해철은 심사위원들에게 충격을 안길 수 있는 곡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여러 대의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성대하고 화려한 전주를 완성했다. 또한 그해 열린 <강변가요제>에서 이상은의 '담다디'가 참가자들 사이에서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을 제치고 대상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신나는 곡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패배의 쓰라린 기억, 전략적 연구가 ‘그대에게’의 산파가 됐다.

신해철은 2014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노래들은 뛰어난 작품성으로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계획은 선명했지만 제작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평소 신해철의 아버지는 집에 있는 악기를 내다 버릴 정도로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신해철은 아버지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멜로디언을 불면서 곡을 지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는 동력이 됐다.


1988년에 탄생한 '그대에게'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흥겨운 분위기, 충만한 원기 덕에 축제 배경음악, 운동경기의 응원가로 두루 쓰인다. 젊은 세대도 익히 알 정도다. 오랜 세월 여기저기서 꾸준히 울림으로써 ‘그대에게’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명곡 대열에 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신해철의 <강변가요제> 탈락은 본인에게, 음악 팬들에게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닐까 싶다. 아기천사로 불렀던 노래는 1990년에 출시된 신해철의 솔로 데뷔 음반에 다른 제목으로 수록돼 큰 인기를 얻었다. 그 노래가 바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다. 이 노래의 전주는 ‘그대에게’의 엔딩 멜로디로 사용되기도 했다. 강변가요제에서 입상해 가수로 데뷔했다면 '그대에게'는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패 뒤에 많은 이에게 길이 기억되는 명곡이 탄생했다.


<법무사지> 2022년 1월호 '세대유전 2080 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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