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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Jul 29. 2022

너희가 국힙을 아느냐

국악 재질 힙합 vs. 힙합 재질 국악

아직 활발해졌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임은 분명하다. 국악을 수용한 힙합이, 힙합과 교류를 맺은 국악이 함께 증가하고 있다. 딥플로우 '작두', 불한당 '불한당가', BTS 슈가 '대취타', 라비 '범', 정상수 '춤추는 가야금' 등이 전자에 해당하며, FUN소리꾼 박유민 '밥타령', 추다혜차지스 '리츄얼댄스', 프로젝트 락 '난감하네', 비단 '성웅의 아침' 등이 후자를 대표한다. 국악과 힙합이 곳곳에서 어우러지는 중이다.


결이 전혀 달라 보이는 힙합과 국악 사이에는 조금 비슷한 면도 존재한다. 어떤 스토리를 지닌 랩은 판소리의 아니리와 유사하고, 사이사이에 지르는 탄성은 고수의 추임새와 닮았다. 힙합은 대개 4분의 4박자를 쓰지만 더러 박자에 변화를 가하는 노래도 나온다. 이런 작품은 판소리, 정악 등에서 장단을 바꾸는 진행을 떠올리게 한다. 두 음악에 일련의 공통점이 있기에 퓨전이 많이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정적으로 힙합과 국악은 각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준다. 그야말로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국악의 성분은 힙합에, 힙합의 요소는 국악에 훌륭한 자재가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룡점정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 '국악 힙합', '힙합 국악'의 탄생은 열띨 수밖에 없다.


루프 이상으로 특별한 기능을 하는 국악기

힙합은 드럼과 래핑을 핵심 인자로 삼는다. 하지만 이 둘만으로 이뤄진 노래는 얼마 없다. 드럼과 래핑만으로는 마치 우유 없이 카스텔라를 먹는 것처럼 퍽퍽한 감이 든다. 그래서 곡의 뼈대가 되는 비트에는 선율이 드리운 드럼 루프가 쓰이거나 이미 정해진 드럼 패턴 위에 악기 샘플, 또는 실제 연주가 추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하여가'를 냈을 때 많은 사람이 놀랐다. 대다수가 '대중음악 반주에 국악기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구나' 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더불어 '하여가'는 능게 가락의 참신하고도 무결한 이식을 통해 우리의 전통 가락이 힙합에서 멋진 루프로 활용될 수 있음을 널리 알렸다. 1호 국악 힙합이 씩씩하고 근사하게 출생신고를 치른 순간이었다.


한편 국악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노래는 고풍스러운 느낌을 발산하게 된다. 달라진 분위기에 맞춰 래퍼들은 "릴러말즈 납시오"(릴러말즈 '태권도'), "여봐라"(제이통 '개량한복'), "암행어사 출두요"(필리, wooziboi '강강술래')처럼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옛말을 가사에 넣는다. 더불어 이런 노래들에서는 한국의 전통문화, 과거의 의복 등이 언급되곤 한다. 비록 언어유희의 목적으로 쓰이긴 해도 힙합에서의 국악기는 우리 유산을 되새김질하는 매개로도 작동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AxO7EPU8c


힙합의 규칙이 국악과 만나 상승효과를 빚을 때

과거에는 전통악기를 곡에 들이려면 연주자가 실제로 악기를 연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국악기도 가상악기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져서 힙합에서 국악기를 편성한 반주를 제작하는 일이 수월해졌다. 물론 팥의 <Piri on the Turntable> 앨범처럼 특정 국악기가 주연이 될 때에는 당연히 연주자가 직접 연주한다.


가상악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기존 국악 연주를 차용해 곡을 짓는 뮤지션들도 있다. 힙합은 샘플링을 고유의 작법으로 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상악기를 잘 다룬다고 해도 명인의 연주를 따라가기는 어렵다. 마음에 드는 샘플을 발견해서 이를 잘 매만진다면 독특한 비트를 지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게다가 가상악기 소프트웨어에는 없는 소리꾼의 음성도 넣을 수 있다.


판소리 <적벽가> 일부를 재료로 취한 불한당의 '불한당가'는 국악 샘플링 힙합의 대표적인 예다. 고수의 북소리를 이어 붙인 루프는 보통의 드럼과 달라 무척 독특하게 다가온다. 계속 흐르는 고수의 추임새는 곡을 한층 역동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또한 훅이 되는 "상일층 용사인 각인"(제갈량이 남병산에 칠성단을 쌓을 때 맨 위층에 네 사람을 세우고 그들의 외양을 설명하는 대목)으로 노래에 참여한 네 래퍼의 위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기막힌 샘플링이 노래의 맛과 멋을 끌어올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DMB9V8j_9gQ


힙합과 결합해 멋들어지는 옷을 입는 국악

대중음악의 주요 소비자는 항상 젊은 세대다. 힙합이 십수 년째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광경은 힙합이 10대, 20대가 애청하는 장르로 깊게 뿌리내렸음을 일러 준다. 최신 유행의 중심에 힙합이 군림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힙합과 결속하면 '힙'한 느낌을 낼 수 있다.


소리꾼 박유민은 판소리 <흥보가>를 바탕으로 한 ‘밥타령’에 힙합의 하위 장르인 트랩 비트를 들였다. 육중하면서도 바삭바삭한 질감을 띠는 드럼, 관현악기의 간헐적 강타, 어두운 분위기 등 트랩의 주된 성질을 잘 나타내는 가운데, 대금과 가야금을 가미해 전통음악의 향도 충분히 전했다. 몇 년 동안 힙합 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트랩에 소리를 펼치니 판소리의 투박함이 증발하고 세련미와 흥이 배가됐다.


사실 힙합을 접목한 국악은 거의 없다. 서문에 언급한 작품들은 펑크(funk), 브레이크비트 등을 뼈대로 둔다. 하지만 이 장르들은 힙합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거나 힙합에서 파생됐으니 힙합과 밀접하다. 펑크를 반주로 둔 추다혜차지스의 '리츄얼댄스', 프로젝트 락의 '난감하네'는 각각 느긋하게 넘실거리는 리듬감과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펑키함을 보유하고 있다. 비단의 '성웅의 아침'은 브레이크비트 특유의 빠른 속도로 가뿐함을 띠면서 북 연주로 강고한 기운까지 발산한다. 힙합과 관련된 장르들이 찰기와 경쾌함을 주입해 줬다.

https://www.youtube.com/watch?v=s-m144VrlzE


판소리, 퓨전 국악에서도 빛을 발하는 래핑의 두 요소

래핑에서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중 하나가 빠르기와 강약을 조절해 본인만의 흐름을 연출하는 리듬이다. 판소리에서도 소리꾼이 얘기의 상황에 따라 리듬을 달리하는 모습이 래핑과 닮았다. 근래 힙합에서는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듯 랩을 하는 '싱잉 랩'이 대세다. 래핑을 아니리와 비슷하게 본다면 판소리에서의 '소리조 아니리'가 싱잉 랩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래핑에서 중시되는 다른 하나는 운, 즉 라임이다.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배치해서 언어적 재미를 확보하고, 래핑에 두드러지는 점을 만드는 작업이 필수다. 연인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음을 의심한 화자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치는 과정을 그린 경로이탈의 '까.투.리'가 라임을 정말 잘 활용했다. 화자는 남자 친구가 몰래 만나는 여자를 까투리라고 명명한다. 데이트 현장을 목격하는 대목에서 '까'를 반복하면서 악센트를 주는 방식("오빠는 내가 사준 까만 수트, 까만 운동화를 신고, 둘이서 까페에서 까푸치노를 먹으며 손깍지를 끼고 있는디! 내 눈에서는 까만 눈물이 흘렀겄다")으로 익살스러운 포인트를 설계했다. 라임이 노래를 한층 돋보이게 한 사례다.

https://www.youtube.com/watch?v=Ghf8EOCbBaY


힙합과 판소리가 공유하는 풍자의 코드

경로이탈은 '팔자아라리'에 취업이 최대 과제인 청년, 내 집 마련은 꿈도 꿀 수 없고 느는 대출이자를 걱정하는 직장인의 현실을 담아낸다. 선명하게 래핑의 형태를 나타낸 고래야의 '잘못났어'는 연인이 없어서 건조하고 외로운 일상을 보내는 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 현상을 꼬집는다. 이처럼 퓨전 국악에서 한국 사회, 보통 사람의 삶을 소재로 한 노래를 이따금 만나게 된다.


몇몇 노래가 내보이는 정치, 사회적 태도는 힙합과 유사하다. 힙합은 파티에서 비롯된 유희의 음악이지만 사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노래도 많이 나왔다. 힙합은 흑인 빈민가에서 발생했고, 이곳 흑인들이 교육, 고용, 복지, 경찰의 대응 등 여러 분야에서 차별을 겪은 탓이다. <흥보가>는 첫째가 부모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던 사회적 관습을, <춘향가>는 양반 이몽룡과 천민 성춘향과의 관계로 신분제를 넌지시 비판했다. 판소리에 깃든 풍자의 성격도 폴리티컬 힙합의 사회참여적인 부분과 상통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5NxNE6Lvz0


흥미로운 관계의 국악과 힙합

음악에서 장르 간 융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러 양식이 얽히고설키며 새로운 스타일로 한 단계 더 진화한다. 특히 국악과의 결합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곱씹는 기회가 되고, 많은 사람이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국악의 매력을 전파한다는 점에서 뜻깊다. 여기에 때때로 힙합이 보이는 비판적 태도, 판소리의 서민 친화적인 성질은 보통 사람들과 교감하고, 우리의 주변을 조명한다는 사항으로 중요성도 갖는다. 퓨전 작업을 마주할 때 이러한 가치를 헤아리면서 듣는다면 국악과 힙합의 만남이 한층 멋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다.


월간 <공진단> 2022년 7월호 '현상진맥'

https://webzine.kotpa.org/vol48?mod=document&uid=3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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