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패닉 '달팽이', 은유와 상징이 근사한 명곡

by 한동윤

차분했지만 꿈틀대는 힘이 있었고 조금은 난해했지만 현학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화려한 구석은 없더라도 울림이 존재했으며 울적해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희망적이었다. 이처럼 독특하고 이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 패닉(Panic)의 '달팽이'는 1996년 초 텔레비전과 라디오 전파를 두루 타며 큰 인기를 얻었다. 다수의 호감을 사기에 수월한 사랑 얘기도 아니어서 히트마저 이례적이었다.


가사는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했다. 일상의 평범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문장들은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고된 일과를 반복하면서 언제나 외로움을 맞이해야 하고("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 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삶에 쫓겨 한결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며 소소한 것으로 위안을 삼는("모두 어딘가로 차를 달리는 길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현대인의 일상을 표현한다. 직장인은 물론 예비 사회인, 현실에 고달파하는 이들로부터 공감을 충분히 획득할 내용이었다.

노래는 마냥 애처로움을 풍기지만은 않는다. 힘들어하는 화자 곁에 온 달팽이는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세상 끝 바다로 갈 것"이라고 말한다. 도저히 불가능함을 뜻할 때 흔히 '달팽이가 바다를 건너간다'고 한다. 패닉은 남들은 다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가능성에 대해 노래한다. 얼마나 걸릴지, 얼마나 힘들지 모르는 길고 험난한 과정일지라도 이상을 향해 나아가서 반드시 이루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핵심이다. '달팽이'는 꿈을 굳게 쥔 이들의 역설적 희망인 것이다.


곡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는 단순한 구성을 취했으며 현란한 치장을 들이지도 않았다. 나지막이 한탄하듯 말하다가 후렴에서 크게 터뜨리고 브리지로 명백한 클라이맥스를 표출한다. 복잡한 음계를 취하지 않은 덕분에 청취자들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요 멜로디를 효과적으로 부각해 영리한 작곡 능력을 드러냈다. 이적은 마지막 음을 안정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다소 미숙한 보컬을 선보였지만 이것이 오히려 꾸밈없는 풋풋함과 정형화되지 않은 개성으로 어필했다.

3255.jpg
3255_in003.jpg

앨범에 수록된 원곡은 피아노와 신스 스트링, 이적의 보컬이 전부였다. 그룹의 노래인데도 다른 멤버 김진표의 참여가 없다는 것은 애초에 큰 비중을 두거나 히트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음악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음에 따라 방송 활동을 위해 김진표가 색소폰을 연주한 버전을 녹음했다. 패닉은 '달팽이'로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서 여러 차례 1위를 차지했다. 1995년 말 데뷔하자마자 PC통신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견줄 만한 그룹이라며 화제로 급부상했으나 눈에 띄는 흥행 성적은 없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무척 놀라운 일이다. '달팽이'는 그룹에게도 역설적 희망이 됐다.


노래는 직접적으로 힘내라고 독려하지 않았다. 고단한 사정을 넌지시 이야기하며 찬찬히 동감을 구했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매개로 가능성을 그렸다. 듣는 이들이 주도적으로 깊이 음미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표현을 아낀 가사는 은유와 상징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점차 톤을 더하며 감정을 끌어올리는 구도는 긍정을 전하는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가사와 곡이 완벽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나타난 셈이다.


테이,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더블유 앤 웨일 등이 리메이크했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수많은 가수 지망생이 이 노래를 불렀다. 세월이 흘러도 많은 이에게 선택됨으로써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했다. 이야기와 곡의 참신성, 탄탄한 예술성을 증명한 것이다.


2014/01

엠넷 <레전드 100 송: 대한민국을 움직인 노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류애를 실현한 스타 가수들의 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