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심리학은 매우 흥미 있는 주제였다.
어찌 보면 가장 할 일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고 뜬구름 잡는 소리 최고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관심이 많고 그런 공부를 하고 싶어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결국 중도포기를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생각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끊어내지 못하고
오늘도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기 위해서 알기 위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좋은 뜻으로 가르침을 준다는 행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춘기 아이의 돌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비단 본인만이 아니라 부모들의 가장 어려운
변화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 첫째가 운동화 세탁에 관해서 의견을 주고받던 것이 생각난다.
보편적 혹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오염도로 검게 변한 하얀 운동화를 세탁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첫째는 아직 괜찮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살아온 결괏값과 보정값을 통해서
그것을 '상식'이라는 기준을 만들어서 살아간다고 믿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정말
검게 변한 운동화였다.
물론 원래는 하얀 운동화였다. 처음 샀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첫째가 이리저리 며칠 동안 돌아다닌 결과로 검게 물들었다.
하지만 단호하게 아직 하얗다고 주장하는 첫째의 말을 어떤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지켜보았는데 결국은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대결로 변하고 있었다.
검게 된 운동화를 왜 아니라고 말할까.
물론 지금 당장 운동화를 세탁하는 것이 싫어서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진짜 그 정도 오염은 그렇게 더럽지 않다는 첫째만의 기준이 확실할 수도 있다.
본인 물건을 통해서 외부에서 '도대체 저 집은 아이 운동화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이런 핀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탁만 하면 다시 새것처럼 보일 운동화가 안타깝기도 하고 운동화를 사준 입장에서
잘 관리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교육적인 관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은 그 사건은 '그래 본인이 검지 않다고 하면 검지 않은 거지'
이런 말도 안 될 것 같은 중재로 그 대결은 일단락되었는데 이 일은 서로의 기억대로
남아서 두고두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나 그때 정말 그렇게 더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입장이나
뚜렷하게 결론을 내어주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춘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틀처럼 사용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 각 자의 기준들이 부딪히면서 틀을 깨거나 새로운 틀로 다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요즘 막내의 종잡을 길을 모르는 시간에서 그것을 알고 싶은 욕구는 강하지만 달리 방법을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고 틀리다, 단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 시간이 필요한 시기일 뿐이겠지만.
우리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무언가 완성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지금은 운 좋게 이 아이의 앞에서 이끌어주던 역할을 했고 이제는 그런 일방적인 방향성에서
아이만의 방향성 혹은 이 시기에 갈팡질팡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잡아주려는 선의조차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겠지.
오늘도 그렇게 작으면서도 큰 소용돌이 혹은 잔잔한 저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 모두
함께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