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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Dec 18. 2020

다다익선 -그래도 하나보단 둘?

육아차차 육아 육아 #2

연애 깊어가던 시절, 어이없게도 우리는 이 가족계획부터 세웠더랬다. 당시 결혼의 성사 여부도 불확실했는데 자그마치 아이를 셋 낳자고, 셋 정도는 있어야지 되지 않겠냐고 멋대로 합의했었다. 이제 생각하면 미친 소리다. 어떻게 똑같은 일을 세 번이나 한다는 말이었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하마터면 계획대로 될 뻔도 한 게, 사실 첫째를 낳고서는 딱히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00 일까지 살벌하게 울긴 했다. 요령이 없어 줄곧 먹이기만 했고 그래서 과하게 통통해졌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로는 크게 속 썩이는 거 없이 잘 먹고 잘 컸다. 첫 아이가 주는 즐거움도 워낙에 강렬했 모든 게 처음이라 새롭고 신비로운 게 더 컸다. 서툰 부모에게 내려진 선물처럼 무난하고 마냥 귀여운 아이였다.

그러던 게 둘째가 나면서 급속도로 힘들어졌다. 당장 낮 동안 감시해야 할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나니 동선이 몇 배 이상 복잡해졌다. 이제 겨우 사람 비슷해지는가 싶었던 첫째는 동생을 따라 되려 퇴행했고 갓 나온 핏덩어리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폭풍의 낮이 마무리되면 밤은 더 했다. 둘을 동시에 재우는 게 불가능해져서 순서를 정했는데, 여기서 밀려난 둘째는 내 품에서 누나가 온전히 잘 때까지 서러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서를 바꾸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원활해진 첫째는 동생이 엄마를 독차지하는 꼴을 용납하지 못했다. 잠 못 드는 불면의 연속이었다.

우린 다시금 똥기저귀와 밤 수유와 태열의 혼돈 속에 던져졌다. 맞다. 이런 식의 쳇바퀴가 아이 키우기였지? 사람은 과거를 미화하는데 도가 튼 동물이었다. 첫째를 너무 수월하게 키웠다고 생각한 건 단지 우리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둘째를 키우면서 첫째 때의 기억이 다시금 정리됐다. 처음이라 정신없이 치렀을 뿐, 똑같이 힘든 과정이었다. 진실을 마주하자 이렇게 힘든 걸 어떻게 했던 건지 의문에 싸였다. 이미 겪어본 상황이라 언제까지 계속될지뻔히 알고 있었다. 그걸 똑같이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곱절로 무겁게 다가왔다.

지금 와서 그 시기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아내와 나 둘 다 퉁퉁 부어있다. 불행하고 괴롭기만 한 건 전혀 아니었지만 체력적으로 바닥까지 소진한 시기였다. 눈을 뗄 수 없는 작은 생명체 둘은 부모의 피를 말리고 생기를 앗아갔다. 그런데 왜 부어있었던 거지? 그건 아마도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그냥, 스트레스성 부종이라고 해두자.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면서 상황이 조금은 나아졌다. 적어도 낮동안에 충전을 할 만한 환경이 조성됐으니까. 그리고 그때쯤부터 둘이서도 잘 놀기 시작했다. 물론 중재자의 존재는 필수였고 사실상 한 공간에서 노는 것일 뿐 각자 노는 게 더 많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하나 책 읽어주는데 나머지가 와서 징징거리거나, 얘를 보고 있는데 저기서 다른 애가 어딜 깨 먹고 있는 건 줄어들었다.

대략 그 시기였던 것 같다. 놀이터에 가서 더 이상 우리가 시소를 태워주지 않고 그네를 밀어주지 않아도 둘이 놀게 된 게. 간혹 술래잡기를 위한 머릿수 채우기 정도는 동원됐다만 최소한의 감시자 역할만 해도 될 만큼 아이들이 컸다.

그리고 우리가 살 만하다고, 둘 낳기를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같은 놀이터 공간에는 외동아이와 함께 온 부모가 따라다니며 놀아줘야 하는 모습들이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더 만족스러웠다. 뭐 딱히 계획을 한 건 아니었지만 둘째가 나온 건 정말 잘 된 일이었다.

꽤나 힘들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크고 보니 둘만으로는 외로울까 하는 걱정도 된다. 언젠가 형제가 많은 게 나중에 장성하고 더 좋다던 어른들의 말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래도 그러지는 않을 거다. 둘이면 됐지 뭐, 어휴. 망각할지언정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다.

여전히 주말이나 저녁 시간이면 자신들의 놀이에 엄마를 끼우려 목놓아 부른다. 나를 지형지물의 하나로 여겨 밟고 매달리는 것도 그대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사이에 아내와 나 둘의 시간이 충분히 확보됐다. 이젠 마주 보고 커피도 한 잔 할 수 있고, 일상에서 일어난 각자의 생활에 대한 한담도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게 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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