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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Dec 19. 2020

반려견이 추가됐다.-그리고, 셋이 되는 이야기

육아차차 육아 육아 #3

개와 함께  계획 시작부터 고민 투성이었다. 독립하기 전, 개를 좋아한 본가의 어른들 덕에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여과 함께 했다. 얼추 10마리의 서로 다른 반려견들과 살아봤기에 그들이 주는 위로와 즐거움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이나 이게 얼마나 신경 쓰이고 부담스러운지도 넉넉히 인지하고 있었다. 작지만 분명한 생명체의 요구에 응하는 일상도 쉽지 않았고, 필연적으로 마주했던 이별은 어느새 켜켜이 쌓여 어떤 거부감으로 굳어져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돌봐야 할 애도 벌써 둘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금 개와의 동거를 고민하게 된  다름 아닌 딸의 간절한 소원이라서 그면 이해가 될까...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딱 그 정도라 치부했다. 뭐 저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잖게 넘겼고, 애써 외면했다.

사실, 그러다 말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개사랑은 생각보다 크고 강렬했다. 이제 겨우 걸음이 익숙해진 시절부터 길을 가다 만나는 개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애정을 표현해야 했다. 혹시 저기 멀리라도 어렴풋이 보이면 구태여 그리로 가서 인사라도 하길 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열정을 알게 됐지만 마음속의 부담과 고민은 여전했다. 이건 딸을 사랑하고 취향을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가장 큰 걱정은 아직 어린아이의 지나가는 욕심에 생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겨줄까였다. 그래. 아무래도 당장은 너무 급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개와 함께 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실망 가득한 얼굴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던 그녀는, 이내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꼭 흰색 멍멍이를 키우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이렇게 열병을 잠재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집요함을 간과한 어른들의 착각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녀 인형 놀이 도중 낯선 호칭이 들렸다.

"이리 와, 혜강아. 물 줄까?"

생소한 이름이었다. 아이가 그런 류의 작명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게 뭐야? 혜강이는 누구야"

"내 이름이 혜X니까 혜강이지. 혜X 강아지란 뜻이야. 내 멍멍이 이름."

멍하니 대꾸할 거리를 못 찾는 우리를 보며 그녀는 자랑스레 으쓱해 보였다. 시인 김춘수를 모르는 꼬마가 실재하지 않는 강아지를 이름 불러 의미를 부여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내와 나는 이 아이의 진심을 스치는 들뜸 정도로 치부하면 안 되겠다고 받아들였다.  

그러고도 여전히 마음의 갈등은 계속됐다. 겨우 여섯 살짜리를 붙잡고 멍멍이는 절대 장난감이 아니니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혜강이가 생기면 꼭 밥과 물은 자기가 챙기겠다는 야무진 다짐도 받아냈다.

그 외에 견종의 선택 과정에서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긴 했다. 앞서 말한 대로 딸은 흰색의 털이 부슬거리는 멍멍이를 원했다. 확고한 취향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류의 개들은 영민해 보이질 않는다고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다. 둘 모두를 만족할 만한 합의점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중 마침 하얀색 털을 포함한 똘똘해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아내도 반길만 한 견종이었다. 그렇게 그 강아지는 우리 집 막내로 우리와 함께 살게 됐다. 물론 이름은 이미 지어진 그대로 혜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보호자는 그의 역할을 충실히 해 냈다. 처음 데려온 지 몇 달만에 몸집이 훌쩍 커졌지만 여전히 작고 귀여운 멍멍이로 받아들였다. 몸에서 흰색의 비중이 줄었음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하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쿨한 보호자의 모습을 뽐다. 쟤가 멍멍이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가 노파심으로 볼라치면 어느새 둘이 붙어서 물고 빨고 있고 그게 또 너무 과해 보이면 알아서 단호하게 대처다. 개 역시도 어린 보호자를 존중하고 의지하는 게 느껴다. 둘째 녀석을 처음부터 자기 아래로 인지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둘은 나면서부터 서로 친구였던 것 마냥 좋은 관계를 유지다.

이것도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다. 혜강이는 처음 크기의 10배나 커졌고 딸아이도 이젠 어엿한 취학아동이 되었다. 그 시간이 흘러도 둘의 관계는 여전히 돈독하다. 이제는 자기 몸 절반 크기가 된 커다란 멍멍이를 귀여워 죽으려고 하는 걸 보면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씐 게 분명하다. 멍멍이 또한 자신을 간절히 원한 어린 보호자를 신뢰하고 잘 따른다. 분명 아내나 나와의 관계성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독특하게도 사람의 손을 절대 핥지 않는 멍멍이인데 유일하게 딸아이의 손만 핥아준다. 애가 손에 땀이 많아서 그래라고 아내가 애써 서운한 걸 감춰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젠가 이별을 맞이할 것이고, 그게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부모의 못난 마음으로는 그런 경험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고만 싶다. 그게 겁이 나서 반려견의 존재 자체를 거부한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 또한 옳지 않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럽다. 그냥 한 발치 뒤에서 바라고 기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게 언제까지고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대치로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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