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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Dec 23. 2020

모두 잘하고 있어요.

육아차차 육아 육아 #6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 놀러 왔다. 우리와 비슷한 연밴데, 결혼을 조금 늦게 한 편이라 애가 이제 막 돌이다. 자주 못 만나던 걸 애가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왕래가 조금 늘었다. 아무래도 둘이서만 갓난쟁이를 거두는 것보다는 왁자지껄한 두 명의 언니 오빠가 있는 우리 집이 좀 더 편할 거니까. 확실히 애들끼리 맡겨 놓고 어른들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이다.

시작이 무슨 얘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꼬리를 물던 얘기는 이웃집 아이의 최근 사고 이야기로 이어졌다.


“화장실에 잠시 갔는데, 갑자기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잠시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이었다.

“몸이 안 좋아서 뜨거운 물을 좀 따라뒀는데 애가 그걸 쏟았어요.”

“괜찮아요? 많이 다쳤어요?”

다행히 발등에 약한 화상만 조금 입었어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얘기하는 엄마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옆의 아빠도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젓는 게 차마 돌이키기도 싫어 보였다. 듣는 우리에게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좀체 얘기가 다른 주제로 넘어가질 못하고 자책이 시작됐다. 원체 여린 사람이라 그런지 그날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어디 얼굴이라도 상했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어요. 이래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나 모르겠어요.”

“에이, 무슨 말이에요. 잘하고 있으면서 뭘 그래요.”

“아니에요. 애 본다고 휴직까지 했는데 화상이나 입게 하고. 너무 속상해요.”


우리의 위로가 통 먹히질 않았다.

“애한테 우유 안 받는지도 모르고 먹이다 피부 다 뒤집어지기도 했어요. 지난 달이었나?”

“우유가 안 맞아요?”

“유당이 안 받는다네요. 것도 병원 가서 알았어요. 내가 잘하는 건지를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진심으로 그 두 분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 그런 일들은 애 키우다 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건데,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문득 위로를 할 만한 우리의 사연이 생각났다. 내가 운을 띄우자 아내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애가 영아산통 앓는지도 모르고 그저 울면 먹이기만 했어요.”

“네?”

사실이었다. 첫째는 태어나 100 일까지 매일 밤을 엄청 울어댔기 때문에, 초보 엄마 아빠는 그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울면 먹이고 울면 먹이는 걸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하루 권장량을 넘을 때도 있었고, 아무튼 엄청 먹였다.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그냥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잠시나마 눈이라도 붙일 수 있었다.

“당시에는 프랑스 아이처럼 키우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거, 뭔지는 들어봤어요.”

“딴에는 아이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호들갑 떨지 않으려 어지간히 노력했어요. 실상은 겨우 태어난 지 석 달도 안 된 핏덩이를 감당 못해서 분유에만 의존했으니 이미 실패였지만 말이에요.

“분유 바꿀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그땐 그런 게 다 부산스럽게 느껴졌어요.”


진짜로 당시엔 그 모든 게 유난 같았다. 우리는 쿨한 프랑스 아이의 부모였다. 지나고 보니 뭔가 잘못 이해한 게 많았지만 그렇듯 초보 부모는 그렇게 애를 살찌울 뿐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둘째를 낳고 나서 진실을 알게 됐어요. 쟤는 조리원 나온 이후로 줄곧 변이 안 좋았거든요. 직구해서 독일 분유로 바꾸니 변이 좋아지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공부를 하니 영아산통 때문에 애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경우가 많다고, 분유를 바꾸면 좀 나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그래도 별일 없이 잘 지나서 다행이에요.”

“유난으로 치부하고 잘난 체할 게 아니라 분유만 한 번 바꿨어도 충분히 해결될 문제였어요. 우리도 그때 얼마나 자책하고 우울했는지 몰라요.”

“그러셨겠어요.”

어느새 입장이 바뀌어 우리가 위로를 받고 있었다.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둘째도 붕붕카 위에 올라간 걸 모르고 있다가 떨어져서 이마가 찢어진 적도 있어요.”

“어머, 괜찮았어요? 지금은 그렇게 별나 보이지 않는데…”

우리 무용담에 놀란 눈이 되어 두 명의 베이비시터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미 자신의 실수 따위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도 보였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면 우린 얼마든 더한 사연도 꺼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물론 철학과 신념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 부모가 되는 시점에선 미완성이게 마련이다. 가진 믿음은 왜곡되거나 그릇되기 쉽고 그마저도 상황에 따라 지켜지지 못한다.


아이가 다치거나 상하기도 한다. 하루 온종일 붙어 있다가도 그 찰나에 일어나는 일은 누구도 어찌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마치 그 순간만 노리고 있는 것처럼 부딪히고 넘어진다.


이렇게나 어려우니까, 애들을 키우다 마주하는 고비에서 매번 스스로 자책하고 좌절한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우리는 대체 어떻게 자란 건지 반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나 어려운 걸 잘 해내고 있는 거다. 비록 잘못된 생각을 하더라도 많은 경우 걸 깨달으면 바수정하고 보완한다. 아이가 정말 위험한 상황에 닥치기 전에 부모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게 마련이다. 매 순간 배우면서 성장하고 결국은 정답을 찾아내는 거다.


애들이 다치는 것도, 바꿔 말한다면 그 짧은 순간을 제외한 그 기나긴 시간을 안전하게 잘 돌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말이 쉽지, 지쳐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모두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


그냥, 이 말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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