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로로 밴드를 보다, 울다.
육아차차 육아 육아 #7
소싯적에 좋아했던 이적의 'rain' 에는 "너를 보고 싶어서 내가 울 줄 몰랐어"라는 가사가 나온다.
예전 언젠가 만났던 사람과 이 구문에 사용된 문법의 적법성에 대해 따져 물었었는데, '너를 보고 싶다'는 말이 과연 문법적으로 맞느냐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 사람은 '네가 보고 싶어서'가 문법적으로 맞는 말이라 하였고 나는 이적 씨가 틀릴 리 없다고 다소 시큰둥하게 넘겼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사람은 이제 없고, 뭐가 옳은지 더는 별로 중요치 않고, 그럼에도 그 노래는 여전히 좋다.
다만 만남도 헤어짐도 예전 같지 않고, 여느 사랑도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메마름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내가, 그리움에 지쳐서 울게 되었다.
그녀는 뽀로로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마냥 귀여운 캐릭터에 대한 호감인 듯했으나, 점차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관심을 보이며 즐기기에 이르렀다. 곁에 있던 나 역시 그녀의 취향에 따라 덩달아 관심이 생겼고, 당연히 그녀를 위한 선물 역시 캐릭터들이 담긴 갖가지 물품들이 되었다.
특히나, 뽀로로 밴드를 좋아했었다. 작은 얼굴로 각각의 캐릭터들이 박혀 있는 밴드를 보며 한참이나 싱긋이 웃는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잠시, 그녀는 내게서 떠나갔다. 부득이한 상황은 우리 사이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바쁜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예의 메마르고 건조한 나로 돌아가 매일에 충실하기에 급급했다.
어쩌다, 손이 베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자주 사용하는 손가락이라 무언가 처치를 하고 밴드라도 감는 게 덧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에 황급히 서랍을 뒤졌다.
거기에, 뽀로로 밴드가 있었다.
애써 의식하지 않고 손가락에 감았지만,
캐릭터들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한 뮤지션의 노래대로,
너무 보고 싶어서 울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한참이나, 손에 감긴 밴드를 먹먹하게 바라보다,
견딜 수 없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야~ 아빠가 딸 너무 보고 싶어. 엄마는 좀 괜찮아?"
산후조리 차 친정에 간 마누라가 빨리 딸을 데리고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