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차차 육아 육아 #34
언젠가 스스로 신발을 처음 신던 날, 딸아이는 스스로 잔뜩 뿌듯해졌다. 반쯤 구겨진 신발을 한참 보더니 부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를 향해
“나, 다 컸지?”라며 씩 웃어 보였다. 정말이지 살벌하게 귀여웠는데 너무 순간이라 뭘 찍어 놓지도 못하고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당연히 아이의 말대로 다 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순간 많이 컸다는 생각은 했었다. 어디서 듣고서 저런 말을 쓰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장거리는 아이가 신발을 스스로 신는 게 기특하단 걸 깨달을 정도로는 큰 거니까.
이런 적도 있다. 한창 빠져있던 공주풍의 치마를 이듬해 봄 어느 날 꺼내서 그 날 입을 옷으로 두니, 그걸 한참이나 쳐다보고만 있었다. 곧 나가야 할 시간인데 아무래도 너무 느긋해 보였다.
“옷 입어야 나가지. 안 입어?”
“오늘 이거 입어?”
“응. 얼른 입어. 늦을라.”
대화가 잠시 멈췄고 아이의 얼굴에 곤란함이 서렸다.
“왜? 이 옷 입기 싫어?”
“응.”
“너 좋아했던 옷이잖아. 작년에 내내 이것만 입었던 거 같은데.”
“그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의견을 피력했다.
“내가 이제 이런 거 입을 나이는 아니잖아. 유치해.”
그 일 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렇게나 그만 입으라고 말렸던 레이스와 분홍색에 스스로 이별을 고하는 아침이었다. 왜냐는 의문에는 유치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학교를 들어가면서 일어난 변화 중 하나였다. 생전 옷 투정 안 하던 아이가 취향의 변화로 옷을 거부한 건 신선한 사건이었다.
막연히 막내 철부지로만 여겼던 아들 녀석의 변화도 새삼스럽다. 식사 습관도 먹는 양도 한결 나아지더니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크고 있다. 그래서일까. 초등학생이 되고선 이제 제법 ‘어린이’ 같다. 더는 먹는 문제로 서로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고 오히려 예민한 미식의 감각으로 원하는 음식을 먼저 요구하는 일도 생겼다.
그런 그가 며칠 전 잠자리에서 내게 한 말은 아이의 성장을 느끼게 했다. 최근 아이들 방을 분리하고선 나와 아내가 번갈아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들 때까지 발치에 앉아 있어 준다. 보통 잠들기까지 할 말이 생각나면 갑자기 아무 말이나 하기 마련이고 우리는 학교 가야 하니 얼른 자라고 재촉하고 마는데 그날따라 말이 길어졌다.
“자야지. 어서 눈 감아.”
“응. 근데, 아빠.”
“왜? 말 그만하고 자야 한다니까.”
“그거 아는데, 나 하나만 더 말할 거 있어.”
“뭐야? 빨리 말하고 자. 벌써 시간이 늦었어.”
내 잔소리에 멈칫하더니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자야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빠, 나 요즘은 같은 말 여러 번 안 하려고 노력해.”
“응. 그래, 아빠도 알고 있어. 잘하고 있어.”
“고마워. 아빠도 이따 잘 자.”
최근의 화두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둘째라 그런 걸까, 강한 누나와 지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그에 대해 주의한 적이 있었다.
“네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단다. 여러 번 악을 쓴다고 더 잘 듣는 건 아니니까 한 번 만 말해도 충분해.”
“응. 알았어. 그런데 내 말 안 듣는 거 같단 말이야.”
“다른 사람이 대화하는 도중이면 당장 답을 할 수는 없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예의야.”
말하는 당시에는 얘가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건지, 이런다고 나아질지 확신은 없었다. 얼마 뒤 비슷한 문제로 또 말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자려고 누우니 무슨 주마등이라도 본 건지, 갑자기 어른스러운 다짐을 하면서 아빠의 심금을 울렸다. 아이의 키가 자란 만큼 생각도 자라고 있었다. 당장 하루아침에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다짐하는 것만 봐도 감회가 새롭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어도, 두 아이 모두 취학 아동이 된 지금까지 ‘다 컸구나’ 싶은 순간들은 수도 없이 찾아왔다. 비단 첫 장면에서 아이 스스로 깨친 저 순간 외에도 말이다. 식사 후 치우다 문득 밥을 더 이상 많이 흘리지 않고 잘 먹는다는 걸 인지한 어느 저녁에, 옷을 이제 뒤집어 입지 않는구나 싶은 어떤 아침에, 혼자 씻겠다며 온 욕실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던 그즈음마다 정말 다 컸구나 싶은 대견함의 연속이었다. 매번 이렇게나 컸나 싶은데, 얼마 뒤 ‘새로 고침’하면 또 그러는 사이 달라진 모습들이 또 보인다. 그저 시간의 빠름이 새삼스럽고 아이들의 습득과 발달이 놀랍다. 울음과 웃음 외에는 없던 갓난쟁이들이 언제 커서 사람 비슷해진 것도 신기한데, 그 끝이 없이 계속 갱신되는 새로움은 참으로 경이롭다.
그런데 하나 확실한 건 아이가 스스로 행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손이 닿을 필요도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다. 여전히 놀아달라고 매달리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일들도 넘쳐난다. 하지만 아주 예전과 비교한다면, 우리가 관여해야 하는 것의 절반 이상의 것들이 아이들만의 몫으로 넘어갔다. 그중 일부는 우리가 힘에 부치고 번거로워 자연스레 넘긴 것도 있고 이제는 아이들 스스로 손이 필요 없다 한 것들도 있다. 여유가 생기니 확실히 후련하지만 섭섭하기도 하다. 언제 컸나 싶은 대견함 한구석에는 어딘가 모를 아련함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손 갈 일은 많다. 다 큰 거 같아 보여도 아직은 부모의 손을 타야만 하는 아기들이다. 빨간 양념을 흰옷에 묻혀대기 일쑤고 목욕 후엔 어디 덜 씻은 곳이 발견될 때도 종종 있다. 잔소리하지 않으면 숙제고 뭐고 다 팽개쳐놓고 놀기 바쁜 녀석들을 두고 다 컸다고 하기엔 민망스럽다. 그럼에도 조금씩 손을 떠나가는 건 분명히 다가오는 사실이다. 오직 부모가 이끄는 대로 끌려오던 녀석들이 자기주장도 생겨나고 그 의견에 따라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쯤 되니 조금씩 새로운 형태의 삶을 조금씩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잘린 무처럼 반듯하게 구분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단계가 다음으로 넘어가는 그 어딘가를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거다. 말하자면 온전한 양육에서 약간의 동거가 조금씩 섞여가는 과정이랄까. 어릴 적에야 일방적인 양육의 과정들만 있을 뿐 독립된 행동의 주체라는 느낌이 미약했다면, 이제는 각자 하나하나의 자기 목소리를 가진 인격체라는 느낌이 꽤 강하다. 부모의 주장만으로 결정짓는 수동적 존재들을 데리고 사는 게 아닌, 자의식을 가진 ‘능동적인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해 나간다는 게 더 적절한 거 같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키우는 것’과 ‘함께 사는 것’, 그 둘의 비율이 계속 변할 거다. 그러다 어느새 양육의 부분은 사라져 버리고 동거가 커다란 부분으로 뒤바뀌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아이와의 동거도 끝이 나고 그들만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새삼 마음이 복잡하다. 갓 태어난 아이들을 맞이하던 감격도, 그들과 뒤엉켜 닥친 문제에 정신없었던 일상도, 모든 희로애락의 사건들이 담긴 첫 장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형태의 조금은 다른 페이지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 할 거 같다. 아직 만나지 않은 그 시기에는 또 얼마나 웃고 울게 될지. 기대도 되고 걱정되기도 한다. 아마 더 자란 아이들과 얼굴 붉힐 일도 더 생길 거니까 다짐하고 대비하는 마음도 가득하다. 분명한 건 지금처럼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우선한다면 뭐가 됐든 잘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그 언젠가 많은 시간이 흐르면 과연 우리가 더는 ‘다 컸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까? 그런 날이 과연 올까? 아주 먼 훗날이라도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딸과 아내가 나눴던 대화로 짐작할 수 있다.
함께 장난치던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엄마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에잉야는 몇 살까지 엄마 아기 할 거야?”
잠시 생각하던 아이는 엄마를 꼭 끌어안으며 답했다.
“내가 백 살이 돼도 난 엄마 아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