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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Dec 14. 2021

악당과 악역, 혹은 사이 그 어딘가.

육아차차 육아 육아 #27

    갑작스러운 고해성사를 하자면, 나는 썩 좋은 아빠가 아니다. 절대 겸손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여러 조건을 따져봐도 결코 훌륭한 양육자는 되지 못한다. 요즘 유행이라는 ‘프렌디’가 될 만큼의 시간과 열정이나, 지치지 않는 체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있는 짬엔 쓰러져 잠들기 바쁘다. 

    부자 아빠는 더더욱 아니다. 당장 가진 것도, 물려줄 것도 없다. 그저 아등바등 모아서 최소한 내가 살았던 것보단 더 낫게 해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경제적 여유의 결핍은 마음의 여유도 앗아갔고 늘 바쁘게 허덕이는데 딱히 손에 쥐어지는 것도 없다. 몸도 마음도, 쫓기고만 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고,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좀 더 어렸을 때, 집에 있는 주말에는 신경 써서 애들 놀이판에 기웃거렸다. 하지만 평소 아빠의 참여가 잦지 않으니 겉돌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놀이에서 내 역할은 그냥 지형지물이었다. 경력이 없으면 단역부터 시작하는 게 그 바닥 원칙이었고 주말에나 겨우 참여하는 비정규직을 위한 배역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닌, 아이들이 먼저 무언갈 요구하는 경우엔 대게 강렬한 악당이 됐다. 쫓거나 먹거나 던지거나. 짧지만 강하게 내 몫을 다하는 건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일이었다. 물론 실제로 날 무서워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마구 매달리거나 짓밟아 제압하려 하진 않았겠지. 

    조곤조곤 책을 읽어주거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보드게임에 끼여봐도 웬일인지 관객들의 만족도는 악당일 때 가장 드높았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몸 놀이. 짧고 굵게 몇 번 넘어뜨리고 간지럼을 태우면 흥분이 극에 달한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극도의 깔깔거림이 여운 가득 남아야 나도 뭔가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주중에 충분히 놀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 조금이나마 사라지곤 했다.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쥐어짜 만들어 낸 나름의 아빠 역할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체력이 안 되거나 다른 일정으로 인해 여의치 않게 되면 자연스레 마음의 빚이 됐다. 몇 년 전, 업장을 확장한 뒤의 상황처럼 절대적 시간이 부족해지니 더 안달이 났다. 당시 메이는 시간이 늘어나니 평일에는 겨우 잠들기 직전의 아이들을 만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자 엉뚱하게도, 죄책감에서 발동된 방어기제가 아이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다소 억지스러운 진행이지만, 틈틈이 내게 주어진 아주 짧은 시간을 아내의 육아를 거든답시고 또 다른 걸 쥐어짜 낸 거다. 놀이에서 우스꽝스러운 악당은 실제 생활에서 규율을 담당하는 진짜 악역을 맡았다. 엄부자모. 고래의 격언에 따라 각자 암묵적으로 맡은 역할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갑작스러웠다.

    당연히 혼란이 찾아왔다. 악역을 맡은 나도, 당하는 관객도 모두가 복잡했다. 특히나 딸아이는 부정하는 마음이 컸고 유독 섭섭해했다. 장난의 대상인 아빠가 자기를 혼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악을 쓰며 울곤 했고 난 그 행동을 고치려 다시 뭐라 했다. 이래저래 상대적으로 더 혼이 나며 자란 둘째는 오히려 반대라 곤란했다. 현실의 악역을 놀이까지 차마 깊숙이 끌어들이지를 못할 때가 종종 생겼다. 누나처럼 마구 덤비지도 못하고 먼발치서 원거리 공격만 겨우 하니, 이게 뭔가 싶었다. 혹여 내가 좀 과하게 집어 들면 금세 항복부터 한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두 역할을 깔끔하게 소화하지 못한 내가 문제였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상황에서 나타났다. 코로나로 업장이 조용해진 덕에 반강제로 여유가 생겼는데, 때마침 일주일에 두세 번 퇴근이 늦어진 아내를 대신해 내가 그 몫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받아와서 밥을 챙겨 먹이고, 숙제를 점검하고, 씻겨 잘 채비를 하는, 아이들과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 속에서 나는 악당도 악역도 아닌 그냥 ‘아빠’였다. 어떤 자극이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공유하자 오히려 아이들과의 관계가 좀 더 건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크게 달라진 건 두 가지였다. 우선 겨우 며칠 저녁 시간일지라도, 내가 할 일은 차고 넘쳐났다. 구태여 없던 역할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좀 더 길게 보니, 입댈 데 없이 충분히 잘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됐다. 엄격한 아빠랑 있어서 아이들이 더 갑자기 더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잘하던 아이들의 진가를 이제야 넉넉히 보게 된, 못난 아빠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할 것을, 뭐라도 하겠다는 쓸모없는 조바심이 아이들 마음만 상하게 한 셈이다. 그저 스스로 노파심에, 쓸데없는 책임감에 그 누구도 편치 않을 역할에 과몰입한 거였다.      


    새삼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 여겨진다. 고맙다. 동시에 엉뚱한 역할 놀이에 빠졌던 스스로가 부끄럽기만 하다. 이제, 아이들에게 악당은 필요할지언정 더 이상 악역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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