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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Nov 23. 2021

두어 살의 멍청한 아장거림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육아차차 육아 육아 #25

    아내와 나는 아기들을 좋아한다. 애 둘에 치이면서 그 정도가 흐려지고 변질됐지만, 아직도 적잖은 애정이 남아있다. 길을 가다가도 몸서리치게 귀여운 아가들을 보면 서로를 불러 그 장면을 공유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또한, 능숙하지 못한 아장거림이라도 만나면 여전히 왼편 가슴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모른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다. 그 귀여운 걸 다시 기르는 현실은, 이미 넉넉히 잘 알고 있다. 그저 보고 즐기는 데서 그치기 위해 늘 몸과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예쁘지만은 않다. 나름의 엄격한 심사를 거친 순도 높은 귀여움만이 우리의 정신을 홀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따지는 가장 큰 덕목은 다름 아닌 멍청함이다. 뭐 따지자면 약간의 허술함, 아이 다운 순수함, 노골적으로 말하면 백치미 따위로 포장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냥 말 그대로 ‘멍청함’이다. 갓 태어난 핏덩어리들이 나이가 들며 점점 똘똘해지고 사람다워지는 걸 일반적으로 성장이라고, 거기에 품을 파는 부모의 노동을 육아라고 칭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자연히 익숙지 않은 것들에 적응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실수나 부족함이 있다. 물론 그게 지나치게 오랫동안 이어지면, 혹은 키우는 양육자의 잣대가 좀 더 엄격하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겠지만, 초기의 수많은 시행착오는 어마어마한 귀여움으로 발현되게 마련이다. 우린 그 어설픔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남의 아이들도 이렇게나 예쁜데 내 새끼들이야 오죽했을까? 아니, 지금도 다른 아이들의 '멍청 시즌'에 홀려있는 건 어쩌면 우리의 초기 육아 경험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에잉야 시절’의 우리 딸에게 했던 장난만 해도 그렇다. 이미 시절을 칭하는 것부터 허술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스스로 제대로 부르지 못해 ‘에잉야’라는, 자기 이름 두 글자 어디에도 없는 세 글자로 자신을 칭하는 것부터가 벌써 미칠 지경이다. 당시 기저귀 찬 엉덩이를 이용한 장난이 있었는데, 바로 그걸 먹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눌한 말로 


    “아냐, 내 엉덩이 안 먹혔어.”


    라며 짓궂은 부모에게 신체의 건재함을 알리곤 했다. 하지만 부모는 짐짓 심각한 투로 


    “그럼 에잉야 엉덩이 몇 개야?”


    라고 물어본다. 사실 이건 꽤 논란이 있는 문제이긴 한데, 그걸 따지는 자리는 아니니 넘어가고. 어쨌든 아이는 원래 만져지던 게 두 쪽이니 당연히 두 개라고 답한다. 그 대답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부모가 되묻는다.


    “그런데 지금 몇 개 있어? 만져봐.”


    아이의 손에 만져지는 건 두툼한 기저귀 한 덩이뿐이고 이내 놀란 눈이 된 ‘에잉야’는 울먹이며 답한다.


    “한… 개…”


    믿었던 양친에게 엉덩이 한쪽을 빼앗긴 아이의 억울함을 달래며, 한편으론 마구 깨물어 주고 싶은 욕구를 애써 억누르던 그 장난은 그렇게나 재밌고 살 떨리게 귀여웠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이의 발달 과정을 고려하면 다행이지만, 기저귀 안에 있는 살덩이의 존재를 깨달은 그녀는 머잖아 그런 어처구니없는 농락에 놀아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도 철없는 부모가 지친 삶에 찌들 때 두고두고 꺼내 볼 살벌한 귀여운 추억 하나는 남았으니 여간 만족스러운 게 아니다.


    사실 이 장난을 아이가 좀 큰 후에 공유한 적이 있다. 네가 이렇게나 귀여웠다는 회상을 본인을 앉혀놓고 낯간지럽게 했었는데, 고맙게도 당사자께서 직접 당시를 재현하시겠다고 나서 주셨다. 그런데, 영 그 맛이 안 났다. 애가 두 배 정도는 커져서 그런 건지, 진짜 기저귀가 없어서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건지, 비단 그런 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의 자의식이 자라고 온전히 자리 잡으니 영 뺀질거리는 느낌만 나는 게 오히려 우리가 놀림당하는 기분이었다.


    순수한 멍청함.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귀여움이란 건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다. 그도 그럴 게 이토록 사랑스러운 시기는 극히 짧다. 대충 걸을 줄도 알아야 하고 대충 의사소통도 돼야 하니 최소한 낳아 일 년 이상은 키워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마저도 자의식이 커지면 마냥 귀여운 건 좀 덜하니 길어 봐야 2년이 채 안 된다. 이른바 미운 네 살의 어딘가 모를 영악함은 귀여움을 흐리게 하고, 이후론 점점 자기의 세계가 커지는 아이들에게서 그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이가 자라며 혼자서 척척 해내는 일의 영역이 늘어난다. 기특하고 대견하지만 어딘지 한편으로는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도 난다. 부모의 도움이나 보살핌 없이도 자립한다는 게, 더 이상 엉덩이 개수 따위 허접한 장난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게 묘하게 마음이 아리기도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사춘기가 조금씩 걱정되는 것도 아마 이런 감정들과 무관하지만은 않으리라. 

    그렇다고 예전 뒤뚱거리던 시절에만 매몰되는 건 별로 건강하지 않아 보인다. 이만큼이나 자란 아이를 두고 해 지난 동영상 속에만 빠져있는 것도 어리석어 보인다. 그저 자라면서 변해가는 행동과 감정에 가장 좋은 것으로 대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언제까지고 품 안의 귀염둥이로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 짧디짧은 추억에만 매여있기에는 멋지고 훌륭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지금을 누리면서 아이의 시간에 최선으로 함께해야겠다. 이렇게 다짐해도, 눈에 들어오는 불특정 아장거림의 공격엔 속수무책이겠지만. 


    늘 아이의 현재를 응원한다. 기꺼이 그러기를 다짐하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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