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차차 육아 육아 #28
연말에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그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급히 쇼핑몰을 뒤져 가장 빠른 배송일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당일 전에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무슨 소린지 아시리라 생각한다. 바로 크리스마스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닌 ‘산타의 선물’을 준비한다. 말인즉슨, 아직은 꼬마 녀석들이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때는 거슬러 올라가 첫 아이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각종 매체를 통해 산타라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던 즈음까지 돌아간다. 아내와 나는 어떻게 할지 태도를 정리해야 했다. 산타 따위 거짓부렁이니 그냥 부모가 해마다 크리스마스에는 원하는 선물을 주겠다는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며 가능할 때까지는 비밀로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에게 억지로 ‘파란 약’을 먹였다. 덕분에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고사리손으로 소원을 비는 귀여움을 보게 됐고, 덩달아 평소 갖고 싶었던 선물을 대리 전달하는 역할도 맡게 됐다. 둘째는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매트릭스’의 세계 속에 사는 큰 아이가 동생마저 끌어들인 덕이었다.
물론 우리라고 허투루 하지는 않았다. 우선 산타 옷을 입은 허술한 방문자를 들이는 것부터 철저히 차단했다. 워낙 발전한 세상이라 핸드폰 앱과 합성 도구가 오히려 더 믿음직했다. 괜히 어설픈 분장과 만나 진실을 빨리 깨닫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나았다. 배송된 물건을 숨기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신발장과 장롱 높은 칸은 아이가 모르는 비밀 창고가 됐다. 무엇보다 당일 아침의 오버액션은 필수였다. 어머. 착하게 사니까 이렇게 근사한 걸 받는구나! 나날이 늘어가는 연기력을 느끼며 때늦은 적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언제고 영원할 거란 생각은 아니었다. 특히나 눈치가 뻔한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우리는 슬슬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해 크리스마스는 큰 탈 없이 지나갔다. 넌지시 눈치를 챈 건가 싶어 유도 질문을 해봐도 또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아직은 순수한 1학년이라 그랬던 거다.
그 이듬해, 그러니까 작년 성탄을 앞둔 어느 날 의혹 가득한 초등학생의 질문을 만나면서 우린 마음을 다잡았다.
“친구들이 그러는데 산타는 없고 엄마 아빠가 선물을 주는 거래.”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또래들 대화 속에서 누군가 천기누설을 한 모양이었다. 말뿐이 아니었다. 하도 의심을 하는 통에 선물 숨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한 달 전부터 모든 택배를 전수 조사해야겠다는 녀석의 기세에 업장으로 몰래 받아 당일까지 내 차 트렁크에 숨겨두는 첩보작전을 했음에도 끝까지 미심쩍어했다. 그래도 부모의 면을 세워주려는 건지, 거두고래 타령이나 하는 동생의 해맑음에 감화된 건지, 그 이상 나아가지는 않고 감사히 선물을 잘 받고 넘어가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나긴 한 해가 다 가고 그날이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작년처럼 드러내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거란 게 이내 밝혀졌지만.
원래는 게임기를 사주려고 했다. 그걸 원하는 눈치여서 나름 준비를 했는데 그걸 논하는 과정에서 간과한 게 있었다. 우리의 모든 대화를 남몰래 듣는 귀가 있다는 사실을. 한국어에 이미 능숙한 녀석은 내색도 없이 우리 대화를 꿰뚫고 있었고 심지어 동생한테도 자신 있게 알린 뒤였다. 철없는 둘째가 신이 난 나머지 귀여운 밀고자가 되지 않았다면 우린 까맣게 모른 채 게임기를 들고서 산타 행세를 했을 것이다. 그럼 이미 예상한 결과를 보고 딸아이가 확신했겠지. 아, 역시나 산타는 바로…!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한 눈망울에 놀아날 뻔한 게 놀라웠고 한편 괘씸했지만, 마냥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른도 작전을 세우는 수밖에. 크리스마스에는 다른 걸 주기로 하고 우리는 일정을 당겨 게임기를 먼저 배송시켰다. 그리고는 택배가 도착한 날 바로 뜯어서 애들에게 안겼다.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었다. 갖고 싶은 거 같아서, 그리고 아마 게임기는 비싸서 산타가 곤란할 거라는 핑계를 곁들였다.
돈이야 이중으로 나가게 됐지만, 아이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안도와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쯤 되니 아무래도 처음 의도는 변질되고 말았다. 이젠 아이와 머리 아픈 수 싸움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때가 되면 무조건 알 수밖에 없는 비밀을 수호하고자 이렇게까지 애를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러고 있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애를 낳고 기르기 전까진 나 역시도 그런 입장이었다. 심지어 아이를 키우면서도 이따금 냉소적인 내가 튀어나오면 진실을 알려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부모가 되니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게 있었다. 비록 내가 살아오면서 퇴색되고 변질됐더라도 아이에게만큼은 남아있었으면 싶은 소중한 그 무언가랄까.
그리고 당분간은, 그게 산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