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차차 육아 육아 #5
애들을 재우는 아내에게 톡을 보낸다.
- 불돼지? 아니면 떡 추가?
이렇게 하면 뭔가 은밀해 보여 더 좋다. 육아와 일상에 지친 삶이라 별 시답잖은 내용으로 낄낄거리는 게 몇 안 되는 낙이기도 하고. 곧 숫자 1이 사라지고 잠시 후 답이 온다.
-저녁에 닭 먹었잖아. 족발 먹자.
뻔히 예상 되겠지만, 위의 암호 같은 두 단어는 각각 불족발과 떡을 추가한 숯불 양념치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의 답장은 그중 돼지 다리를 맵게 조리한 요리를 원한다는 걸 뜻하고.
두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까지, 특히나 밤에는 늘 5분 대기 상태였다. 재우다 함께 쓰러져 새벽에나 우리 침대로 돌아가거나 애들과 아침을 맞기 일쑤였다. 당연히 온전히 부부 두 사람에게만 주어진 시간은 짧디짧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문득 심야 시간에 여유가 찾아왔다. 혹시나 잠 패턴이 바뀌어 또 깰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지켜본 두 달여의 시간 끝에 드디어 확신이 생겼다. 이 시간만큼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이라고. 아이들이 깨지 않고 쭉 자게 됐으니 이제 우리는 긴긴밤을 잘 보낼 궁리만 하면 됐다.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 봐야 채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어느새 우리 몸은 그 시간을 즐기는 법을 까맣게 잊고 그저 잠들기 바빴다. 원체 낮에 피곤하고 지친 상태였고, 애들 따라 우리 수면 습관도 길들어 버린 탓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 쓰러져 허송세월하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애들이 없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압박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다. 처박아 놨던 게임기도 꺼내 보고 넷플릭스에 가입해서 밀린 영화와 드라마도 틀어 봤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안타깝게도 잠을 이기지 못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우리 사이에 정착하게 된 게, 바로 야식이었다. 저염과 유기농의 맛없는 음식 더미에서 헤매던 두 성인은 맵고 짜고 단 게 필요했다. 게임을 하든 영화를 보든 맨입보다는 뭔가를 우물거리며 하는 게 더 흥겹기도 했다. 이런 사유로, 매일 밤은 아니라도 꽤 잦은 횟수로, 우리는 먹거리와 함께 밤을 보냈다.
사실 야식 자체가 건강과는 거리가 멀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체력이 육아 이전의 상태가 아니란 것이었다. 어떤 유흥이든 진행하더라도 차마 그걸 마무리할 정도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위장까지 가득 차니 잠에 빠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급기야 입에 음식을 물고 자는 경우까지 발생하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심각성을 크게 깨달은 건 아내가 먼저였다. 옷을 갈아입다 위화감을 느낀 그녀는 체중계에 올라가고선 기함했다. 그리고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이렇게 불어난 채로 남은 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물론 나도 예사롭지 않은 건 느끼던 차였다. 아침이면 지난밤에 먹은 음식들로 더부룩하고 몸이 무거웠다.
그녀는 운동을 감행했다. 식단을 병행해서 빼먹지 않고 헬스장도 꼬박꼬박 다녔다.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녀는 목표한 수준의 몸무게에 도달했고 성취감을 느꼈다. 나 역시도 짬을 내서 홈트레이닝이랍시고 하루 10분이라도 맨몸 운동을 했다. 덕분에 아내만큼은 아니라도 몸이 얼마간 가벼워졌다. 그러는 동안 체력도 좀 회복됐고 어른들만의 밤을 보내는 요령도 생겨 좀 더 풍요로운 야음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허전했다.
둘이 시시덕거리는 건 변함없었지만 아쉬운 뭔가가 분명 있었다. 그건 누가 먼저 꼬집어 내뱉지는 않아도 사실 우리 모두 아는 내용이었다. 짧은 폭식의 밤들은 우리 뇌리에 강렬한 여운을 남겼고 어느새 그걸 그리워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넌지시 내뱉은 내 의견에 아내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 문화를 복원하는 데는 주저했다. 어떻게 뺀 살인데 그걸 다시 붙이느냐며 펄쩍 뛰었다. 다만, 단호한 기색은 아니었다. 잠시 아쉬움이 얼굴에 스쳤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주말에만 먹는 건 어때?”
좋은 의견이었다. 뭔가 굉장히 합리적인 제안 같았다. 역시, 바라는 건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주말 한정이긴 해도, 다시 야식의 세계로 돌아왔다.
사실 안 먹어도 그만이다. 횟수를 줄인 들 몸에 좋을 리도 없었다. 한정된 메뉴에 심지어 죄 열량 폭탄들이라 속에 부담이 되는 건 자명했다. 그런데도 야식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된 건 둘만의 식탁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나 싶다. 달래가면서 떠먹여 주고, 막상 내 밥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그런 식사가 아닌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시간.
내 일자리의 환경이 복잡해지고 아내는 소위 ‘독박 육아’에 던져지는 일이 잦아졌다. 애를 건사하며 먹는 끼니라는 건 뻔했다. 정작 자기 몫으로 잘 차린 정찬은 사치로 여겼고 그마저 거르는 게 빈번했다. 그게 안타까워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딴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게 야식이었는지 모르겠다. 빠듯한 살림에 번듯하게 뭘 척척 다 해주지는 못해도 위로의 닭튀김 정도는 사줄 수 있었다. 아니, 고생하는 걸 뻔히 아는데 뭐라도 공치사는 하고 싶고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겨우 그깟 족발 정도가 다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거 같다. 마음의 칠첩반상을 현실적으로 차린 게 배달 야식이라면 너무 비약일까.
이런 내 의견을 나누다 보니 아내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온종일 밖에서 뭘 먹고 살았는지도 모를 이에게 따스운 밥상을 차려주고 싶지만 그건 정말 힘들고 큰일이었다. 밑반찬 하나에 쏟는 정성 어린 찰나를 아이는 허락하지 않았다. 영양가가 덜 할지언정 마음만은 고스란히 느껴지는 밤의 식탁으로 서로를 초대한다. 비록 정식으로 근사하게 차려진 산해진미는 아니지만, 우린 그렇게 그 너머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위를 살핀다.
잘 지내지?
힘들진 않아?
오늘은 어땠어?
서로를 향한 위로가 군살과 내장지방이 되어 온몸에 쌓이는 기이한 경험을 하며, 우린 또 하나의 기억을 공유한다. 이것도 아이가 더 자라고 삶에 여유가 생기면 추억팔이할 기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으로선 기약 없는 미래니까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번 주말 저녁도 배달 앱을 기웃거릴 것이다.
측은히 여기지 마라.
우리의 살찌는 밤이 당신들의 낮보다 더 아름다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