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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Mar 23. 2022

낮말은 딸이 듣고, 밤말도 딸이 듣고.

육아차차 육아 육아 #31

    게임 ‘동물의 숲’을 하려면 닉네임이 필요하다. 본격적인 진행에 앞서 자신의 호칭을 정하는 건데, 수십의 형용사와 명사 중 각각 하나씩 고른다. 딸아이의 선택은 ‘귀 밝은 딸’이다. 그 수많은 조합 중 왜 그걸 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도 그녀다웠다.


    “나 귀 밝은 딸 맞잖아? 이게 젤 어울려서 한 건데?”


    당연한 걸 몰라서 묻냐는 심드렁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내가 당신들이 원하는 걸 해서 너무 기쁘지 않냐는 뿌듯함도 가득했다. 과연 눈치가 뻔한 녀석이었다. 팔불출 같지만, 자칭하는 별명이 너무도 찰떡이라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난다. 


    스스로 자랑하듯 그녀는 귀가 밝다. 따로 가르친 적이 없는 귀가 밝다는 말을 이미 이해하고 정확하게 적용하는 것만 해도, 이해력과 판단력이 발군이다.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파악에 영민하다는 걸 깨닫긴 했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으레 애들이 다 그런가 했는데, 아들 녀석을 키워보니 다 그런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던 게 최근 그녀가 받아온 학년 말 통지표에 적힌 ‘상황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라는 평가를 보니 마냥 콩깍지만은 아닌 듯하다. 

    게다가 입도 야무지다. 논리력과 강단을 가진 전사이면서 동시에 정서적 공감에도 능숙하다. 그렇다고 애써 이렇게 키운 적은 없다. 같은 배에서 나고 같은 방식으로 키운 둘째 녀석에겐 분명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매력이다. 


    따지자면 태교가 남다르긴 했다. 첫아이라 유난히 신경 써서 뱃속부터 길렀더랬다. 그 좋아하던 커피며 라면도 다 끊고 꼬박 열 달을 살았으니 말도 못 할 고생이었지만 그런 만큼 건강한 아이의 탄생을 간절히 바랐다. 뭐 그런 유난을 떨어댔어도 정작 바라는 건 크게 없었다. 그저 큰 탈 없이 나오는 게 최우선이었다. 거기서 조금 욕심을 부려본 게 언감생심 아내가 쓰던 컴퓨터 바탕화면을 송혜교 씨의 사진으로 바꾼 정도? 

    그리고는 다른 건 몰라도 ‘입이 까진 아이’가 되길 바란다는 작은 소망이었다. 애를 낳아본 적도 길러본 적도 없는 초보 부모의 환상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 아이가 상황에 맞게 말을 하는 게 너무 귀엽고 재미날 것만 같았다. 다른 건 당장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잘하거나 연예인급으로 예쁘거나, 부모가 가지지 못한 뛰어난 능력을 바라는 건 너무 막연했고, 별로 재미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우리의 말에 재치있게 대꾸하는 아이는 너무 재밌을 것만 같았다. 너무 거창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잡다한 것 제쳐두고 유일하게 고민한 소원이어서였는지는 몰라도 태어난 아이는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를 자지러지게 했다. 송혜교 씨 사진 덕은 전혀 보지 못했지만, 기대한 이상의, 엄청 입이 여문 아이가 나온 것이다. 


    귀가 밝고 입이 여문 초등학생과 함께 산다는 건 되게 재미있는 일이다. 원래도 키우기 재밌던 녀석의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는 게 실시간으로 보이니 자연히 새롭고 놀라운 일의 연속이다. 부담스럽기도 하다. 점차 구축할 세상이 건강할 수 있게 돕는 게 부모의 우선된 역할일 테니, 핏덩이의 양육과는 방향과 신경 쓰임도 다르다. 아직 부모의 손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독립적일 수는 없는 경계에 있어 그럴 거다. 

    학교나 학원에 있는 동안은 일일이 어떤 환경에 노출되는지 알 수가 없다. 좀 더 어렸을 때는 그게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혹여 나쁜 습관이 들어버릴까, 원치 않는 거칠고 자극적인 것에 노출될까 싶어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얻은 교훈은 그러는 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노파심이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거니와 마냥 가리고 감추는 게 능사도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달았기 때문이다. 옆에서 도울 건 돕고 크게 엇나가지 않게끔 잘 잡아주고 응원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게 지금까지의 생각이다. 폭풍의 사춘기를 맞이하면 이 다짐이 어찌 변질될지는 확신이 서질 않지만.


    아이 자신만의 공간이 넓어지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들도 생겨났다. 그들만의 문화라든가, 그들의 말 습관이라든가, 또래가 나누고 즐기는 것들에 대한 단순한 이해를 넘어 공감하고 나아가 선별하는 일이 조금씩 늘어났다. 귀는 밝고 입은 야무진 그녀는 늘 그래 왔듯, 또래 사이 말의 습득도 같은 식으로 했다. 그중 몇 가지는 기성세대인 우리로선 좀 뜨악하게 했다. 이를테면 언젠가 자기주장을 막 하다 말고 우리를 동그랗게 쳐다보며


    “인정?”이라고 짧고 강하게 물었던 적 말이다.


    인터넷에서 초등학생들이 그러고 논다는 걸 간접적으로나 알았지 우리가 가르친 적도 없는 말을 우리 상대로 쓰는 상황이 꽤 낯설었다. 그렇다고 비속어를 쓴 것도,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니 불쾌함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에 부모는 어색하게


    “어… 인정해…”라고 조심스레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응이 어색했는지 우리의 귀 밝으신 따님께서는 그 이후로 그 말씀을 하지는 않으시지만.

    짜증이라는 단어가 최근 들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적잖이 신경 쓰인다. 동생도 엄마나 아빠도, 누구든 거슬리게 하는 상황에서는 짜증 나게 한다는 말을 부쩍 한다. 다짜고짜 다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건 잘못된 거라고 가르치지만, 아이의 감정이 점점 성장한다는 징표일 거니 이것 또한 조심스레 지켜볼 따름이다. 아직 방문 닫고 문 걸어 잠그는 상황까지는 좀 남은 거 같으니 이제부터 좀 더 밀당을 잘하는 수밖에.


    막연하게 바랬던 대로 멋진 아이와 함께 살게 된 행운을 누렸다. 그녀 덕에 많이 웃었고 넘치게 행복했다. 그 성정이 앞으로 어긋나거나 변질되지 않게 하는 건 부모 된 사람들의 몫이 꽤 큰 거 같다. 이제 마냥 즐기기에는 신경 쓸 게 많아지는 것이, 훌쩍 커버린 아이를 보며 묘한 부담감도 커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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