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미 Dec 10. 2022

‘착한’의 무게

: ‘착한’것이 좋은 것인가? 완벽한 것인가?

『착한 달걀』(길벗어린이, 2022)

글/ 조리 존, 그림/ 피트 오즈월드, 옮김/ 김경희




착하게 태어난 달걀이 있다.



나무 위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해주고, 누군가의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어주고, 누군가의 마른 화분에 물을 주고, 누군가의 구멍 난 타이어도 바꿔주고, 누군가의 낡은 집에 쓱쓱 페인트칠을 해주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착한’ 달걀이기 때문이다. 착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써서 남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착한 달걀의 도움을 받은 이들의 표정은 그리 달가워 보이지 않는다.



착한 달걀은 태어나자마자 마트로 보내졌다. 아마도 착한 달걀은 양계장에서 태어난 것 같다. 착한 달걀은 자신과는 너무 다른 11개의 달걀들을 만나면서 더 착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진 기질을 이들에게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하고, 이들과 어떤 방법으로 어울려야 하는지 전혀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착한 것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 착한 달걀은 자신의 방법으로만 그들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착한 달걀에게 다른 달걀들과 소통하고 다른 달걀들을 이해하는 사회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착한 달걀과 함께 있는 다른 달걀들은 잠자는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달달한 시리얼만 좋아했고, 자주 짜증을 부렸고, 이유 없이 엉엉 울고, 물건을 일부러 부쉈다.



착한 달걀은 이런 문제를 만드는 다른 달걀들 앞에 친구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모범이 되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이런 착한 달걀의 노력은 허사였다. 어떤 달걀도 착한 달걀의 지적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이 달걀들은 나쁜 달걀들일까? 문제 행동이라고 보여준 것들이 모두 착한 달걀 눈에 비친 문제 상황의 한 장면이라면 어떤가?



필름을 되돌리듯이 다시 문제 행동들을 다른 달걀들 시선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좀 늦게 자고, 달달한 시리얼을 좀 먹고,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감동을 받으면 울 수도 있고, 물건을 부수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전후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착한 달걀을 괴롭히게 보이는 장면도 함께 놀자는 몸짓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착한 달걀이 원하는 것이 아니어서 착한 달걀이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들도 잘한 것은 없지만, 그들의 서투른 친해지고 싶은 표현일 수도 있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같은 상황인데도 다르게 해석이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착한 달걀은 다른 달걀들의 행동이 있을 만한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또, 일방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착한 달걀과 상대적으로 나쁜 달걀이 되어 버린 다른 달걀들 사이에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도 같다. 다른 달걀들은 자신들 나름의 상황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들의 행동을 모두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달걀들도 자신들의 상황에 매몰되어 착한 달걀의 도움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착한 달걀은 다른 달걀들과의 생활에 점점 지쳐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껍질에 금이 나 있었다.



착한 달걀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성품대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착한 달걀은 ‘착하다’는 것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정해진 규칙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나 다른 사람들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부족했던 것 같다.



착한 달걀이 앞서 했던 남을 도와주는 행동에서도 보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가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 장바구니가 무거울 것이라는 생각, 화분에 물이 넘치게 물을 주는 행동, 타이어를 바꾸기 위해 힘들게 자신의 차를 들고 있어야 하는 딸기의 입장, 낡은 집의 페인트칠이 마음에 들지 않은 식빵의 입장, 정원의 나무까지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착한 달걀은 주변의 상황과 남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림에서 여실히 보인다.



그리고 친구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착한 달걀의 행동에서도 착한 자신의 시선이 옳다는 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착한 달걀에게 보이는 다른 달걀들의 특징으로 다른 달걀들의 이름을 지었다. ‘그 친구들은 자신의 이름에 만족할까?’ ‘그 친구들에게 다른 자신의 이름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착한 달걀은 달걀 상자에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는 모두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자신은 단지 ‘착한 달걀’ 일뿐이었다. 착하게 태어나 착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착한 달걀’이라는 것 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고민은 해 본 적이 없다.



의사 선생님은 착한 달걀이 너무 부담이 많아서 병이 났다고 했다. 착한 달걀이 가지고 있는 부담은 모든 달걀 친구들이 자신처럼 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착한 달걀은 그날로 마트를 떠났다. 처음에는 외로웠지만, 이발을 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로 하고 나니 마음의 색깔이 달라져 있었다. 착한 달걀은 혼자서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산책도 하고, 독서도 하고, 일기도 쓰고, 고요하게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모든 시간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서 썼다.



착한 달걀이 자신을 돌보면서 생각을 많이 정리하고, 다시 11명의 친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트 안의 달걀 값이 떨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착한 달걀은 친구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안부를 묻는다. 착한 달걀의 친구들도 착한 달걀이 돌아온 것을 환영했다. 이들의 환영에서 착한 달걀이 떠나고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고 후회해서 착한 달걀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이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변한 것은 착한 달걀이었다. 착한 것이 완벽한 것이고, 그래서 완벽을 유지하려던 착한 달걀은 이제 그것이 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것이 자신만의 완벽한 성에 갇혀 있는 것보다 훨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착한 달걀은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 것이다. 착한 것만이 완벽하고, 좋은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연민 없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이 제대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도울 수 있을까.

세상에 좋은 것만 있다면 완벽한 세상이 될 수 있을까.



착한 달걀 머리 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착하다’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자신을 병들게 한다. 자신의 착한 행동을 남들은 당연하게 느끼고, 때로는 귀찮게 느끼기도 한다. 타고난 것이 아무리 착하다고 할지라도 자신도 착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자신의 착한 프레임에만 갇혀 있으면, 그 노력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소통하는 삶 속에서 인정을 받아야 자신이 또 한 발 내디뎌 볼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의 한 마디>

다른 사람의 단점만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면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o4uZczZqwjV9-hoLOni7hQ==?uid=4f8c6c5e6d91434c8dde0827240053cb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 악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