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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Jan 07. 2023

예쁨의 발견

: “되게 예쁘다”

『내가 예쁘다고?』(봄볕, 2022)

글: 황인찬, 그림: 이명애




수업 시간 짝이 ‘나에게’ 작게 던진 한 마디. 

“되게 예쁘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나’에게 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쉬는 시간이 되어도 ‘나’는 짝이 던진 작은 한 마디가 큰 울림으로 다가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 말이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한 번도 자신이 예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예쁘다’는 표현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여성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남자에게는 ‘멋지다’ 혹은 ‘잘 생겼다’는 말이 ‘예쁘다’와 평행선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남자인 ‘나’는 자신에게 향해 있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색연필 하나도 빌려주지 않던 짝이 ‘나’를 예쁘다고 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 하루 종일 머리에 맴돌았다. 



‘나’는 자신이 예쁘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도 ‘나’는 빤히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니 자신도 예쁜 데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또, 할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잘생긴 내 새끼’라고 하는 말도 예쁘다는 것과 통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 자신이 어쩌면 예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짝이 던진 ‘예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기분 좋은 말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나’가 축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붉게 물든 하늘이 예쁘다고 하셨다. ‘나’는 자신도 노을만큼 예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다음날 등교한 ‘나’는 짝에게 먼저 인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어제 ‘예쁘다’는 말을 해 준 짝에게 오늘 먼저 인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짝이 말해 준 ‘예쁘다’는 것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았을 것이다. ‘예쁘다’는 말에는 인정과 설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짝에게 다가갔다. 작은 용기가 필요한 순간, 그때 짝의 한마디가 ‘나’를 그 자리에 멈추어 서게 했다. 



“와, 되게 예쁘다.”



“진짜 예쁘지? 

내 자리 엄청 좋아! 

여기서는 창밖에 벚꽃 핀 게 보이거든.”



우연히 들은 짝과 다른 친구의 대화에 ‘나’는 얼굴이 너무 뜨거워졌다. 귀까지 빨개진 ‘나’의 뒷모습에서 ‘나’의 얼굴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너무 창피해서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예쁨을 부끄러워하면서 짝의 말을 오해한 것에 대해 자책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마음과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이 ‘나’의 마음 안에서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분홍색 팝콘이 날리는 듯한 벚나무 아래서야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벚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짝 김경희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에 와닿았다. 벚꽃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벚꽃을 한 번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벚꽃 아래서 올려 다 본 하늘 아래 벚꽃은 짝의 말처럼 충분히 예뻤다. 예쁜 걸 보니 자신의 창피함도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예쁘다’는 말은 비단, 여자들에게만 한정된 단어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나름의 ‘예쁨’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쁘다’는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벚꽃의 예쁜 것과 저녁노을의 예쁜 것이 다르고, 초등학교 사내아이의 예쁜 것은 또 이것들과 다른 느낌의 예쁜 것이 있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벚꽃이 필 때의 예쁨과 질 때의 예쁨도 있고, 저녁노을의 예쁨과 푸른 하늘의 예쁨도 있다. 화려한 순간만이 예쁜 것은 아니다. 



짝의 ‘예쁘다’는 말에 설레어 그 말을 ‘나’가 곱씹어보지 않았다면, 창문 너머 벚꽃의 예쁜 모습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오해였지만, 짝의 말로 인해 ‘나’는 ‘예쁘다’는 것에 관심이 생겼고, 공감하는 마음이 생겼다.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의미를 준 적이 있는가. 그 의미는 생명을 부여해 주고, 자신의 마음을 좀 더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다운 자신이 살고 있다면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책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학교, 집, 엄마와 나누는 대화, 방과 후 축구 수업, 할머니가 데리러 오는 설정까지도 익숙한 일상의 모습이다. 그래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아이의 오해가 불러일으킨 설레는 하루의 작은 이야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그림책을 보는 내내 미소를 띠게 만들어 준다. 



‘예쁘다’는 것은 특별하게 부여된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가지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울림이 건네는 위로가 있다. ‘예쁘다’는 말을 쉽게 하면서도 그것의 가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그 말이 스쳐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아이의 한 마디>

‘예쁘다’는 말이 아니어도 ‘나’는 충분히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PuKD95RMWHJexzJMR4nu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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