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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Jan 07. 2023

나의 첫걸음이 누군가의 발자국

: 욕심에 갑자기 바뀌는 세상이 아니라, 필요로 서서히 바뀌는 세상

『내 마음속에는』(노란상상, 2018)

글 : 차재혁, 그림: 최은영




안락한 소파, 쌓여 있는 책들,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휴지, 다정한 반려견, 따뜻한 조명이 푸근하고 편안한 사무실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답답한 마음에 무엇하나 제대로 찍지도 못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나선 산책의 끝은 사무실로 돌아와 뜨거운 커피 한잔을 내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자신만 안갯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남자가 있다.



한 송이 두 송이 날리던 눈발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무실 밖의 세상을 모두 덮어버릴 듯이 함박눈이 쏟아진다. 곧 세상이 멈출 것만 같다. 사무실에 머무르고 있는 그 시간이 세상에서 밀려난 것 같으면서도 안전하게 느껴진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창가에 올려두고 창문의 물기를 좀 걷어내니 바깥세상의 한 조각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남자가 창가에 서 있다. 우두커니 서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마치 자신의 공간과 바깥세상의 경계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것 같다. 



6시 25분. 



공식적인 퇴근 시간이 지났다. 사무실 안에 머무를 것인지 문을 열고 나갈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 같은 시간이다. 그 남자는 어딘가로 나서고 싶은데 혼자서는 갈 용기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 남자는 전화로 친구들에게 같이 갈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친구들은 함께 갈 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남자도 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 남자는 눈보라를 뚫고 이 추위에 떨면서 어두운 밤에 혼자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자꾸 망설여지는지 애꿎은 함박눈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남자에게서는 혼자라도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남자는 자신의 공간과 바깥세상의 경계에 있다. 



그 남자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 남자 몸 위에 살포시 쌓이는 눈이 무심하게 느껴진다. 그곳에 간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그냥 그 남자의 일이나 하라는 친구의 말을 뒤로한 채, 그 남자는 저벅저벅 걸어서 많은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에 올랐다. 친구의 말이 야속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그 남자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그곳에 가는 것이 의미가 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남자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서 외쳐대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을 뿐이다. 남자는 끊임없이 많은 생각들을 떨쳐내지 못한 채, 깊은 한숨만을 토해냈다. 



퇴근 시간, 지하철을 가득 채운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 남자는 이들도 자신과 같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함께 간다는 것은 마치 ‘당신의 선택이 옳아요’라고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 같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변종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들 것이다. 나의 신념에 대한 확신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남자가 목적지에 내렸다. 남자보다 앞서가는 아이의 가방에 노란 리본이 붙어 있다. 남자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가려던 곳이 어디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여전히 함박눈은 내리고 있다. 남자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촛불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과 같이 촛불 하나를 들고 있는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보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묻는다.

‘오길 잘했어. 그렇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으면서도 마음속에서 해 보라고 요동칠 때가 있다. 

별다른 소득이 없을 것이라는 결과를 뻔히 알고 있는데도 한번 해 보라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다. 

내가 내 걷는 한 걸음이 아무 의미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작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럴 때, 누구라도 멈칫하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시작하기도 전에 멈칫하며 멈추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는 않을까.



그런데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해야 한다’는 채찍질이 먼저 다가올 때가 있다. 그래서 멈추어야 하는 이유가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것을 덮어버릴 만한 정당한 이유 하나를 찾고 싶은 마음이 나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어렵게 내가 내디딘 그 첫걸음이 사실은 누군가가 이미 걸어온 발자국인 것을 알게 될 때, 그때 자신의 주저함이 후회가 되면서,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얻게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동시에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는 사실이 전해 주는 든든함이 있을 것이다. 소수의 욕심으로 한꺼번에 천지가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서서히 채워가며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의를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방향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내 마음속에 울림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기보다는 한 번쯤은 그 울림이 울리는 곳으로 따라가 보는 것도 자신의 새로운 세상을 만날 가능성을 열어두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의 한 마디>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이 추위보다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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