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휴식’ X ‘위로’

: 그림책에 노래를 싣고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도망가자

복잡하지 않을 것 같은 멜로디 속에 울려대는 피아노 소리가 마음을 두드린다. 단조로운 음표 위에 살포시 얹은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내가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 목소리는 나와 함께 있어 주겠다며 나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넨다. 독특한 선우정아의 음색 위로 따뜻한 온기가 내 가슴에 전해지는 것 같다. 힘들고 외로운 내 감정을 토닥여주는 것 같다.

‘울어도 되고, 지쳐도 되고, 느려도 되고…….’라며 내가 이미 알고 있고, 누구나 어렵지 않게 뱉어내는 이 다독이는 말들이 ‘내가 옆에 있을게, 어디로든 어떻게든 갔다가 씩씩하게 돌아오자, 나만은 어디든 너랑 갈 거야’라는 진정성 있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괜찮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하는 것 같다. 가볍게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 ‘괜찮다’는 것에는 힘들어하는 사람 스스로가 문제를 극복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소 크다. 이제 그 문제를 함께 하려는 것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나에게도 이미 나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다.

그런데 꼭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그 순간을 함께 보낼 수도 있다. 곁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 줄 수가 있다. 그래서 선우정아가 들려주는 ‘도망가자’는 말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하고 그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말로 들렸던 것 같다.

나의 짐이 무거워 친구에게 전화로 한참을 운 적이 있다. 친구는 같이 울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올여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홍콩에 가자!’

그 말에 눈물이 그쳤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여행을 가자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친구와 나는 결혼하면서 함께 여행 간 적이 없다. 각자 다른 친구들이나 가족들과는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둘이서 함께 여행 간 것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아득하다.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서로 지나치게 배려해서 각자의 시간을 뺏을 수가 없었다.

내 짐이 무거워 울던 내가 여행을 가자는 친구의 낯설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그렇게 하자고 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대화인 듯 하지만, 나를 위로하는 그 친구의 마음이 온전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홍콩은 친구와 나를 이어주는 꿈의 나라이기도했다. 중학교 시절 내내 홍콩 영화에 빠져 언젠가는 둘이 꼭 가자고 했었다. 그런데 매해 그 여행을 다짐하기만 하고, 눈앞에 생활에 치여 미루고 미루었다. 대학만 가면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홍콩 여행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친구가 다시 꺼낸 홍콩 여행이 지금 내 짐을 덜어줄 수도 없고, 없애줄 수도 없지만, 숨 가빴던 나의 호흡을 잠시나마 가다듬을 수 있었다.

나를 위로하는 노래 속에서 나를 위로하는 친구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따뜻한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노래가 그림책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림책은 노래를 들으면서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제주도 어느 바닷가의 따스한 햇살과 기분 좋게 살랑대는 바람의 느낌에 색을 칠해 놓은 것 같았다.  

그림책 작가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막막한 마음을 잠시라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자신의 편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가사를 그림으로 그릴 때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함께 가는 동반자가 누구냐’에 더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들을 때 목적지보다 나와 함께 도망쳐 줄 누군가를 떠올렸다. 결국은 돌아오겠지만, 지금은 잠시 함께 떠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라면 나의 수고와 걱정을 묻기보다 말없이 잠시라도 함께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책에는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준 반려견에게 이제는 자신이 힘을 주고, 아픈 현실로부터 함께 도망도 갔다가 씩씩하게 돌아오는 여자와 반려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려견을 친구로 그린 것이 나에게는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책상 위의 사진들이 여자와 반려견과이 함께 보낸 긴 시간을 보여준다. 반려견도 여자도 어린아이였던 한 장의 사진과 이 시간을 뛰어넘어 둘 다 어른이 된 사진이 나란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반려견의 힘없는 모습과 여자가 반려견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지금까지 반려견에게 받았던 위안을 여자가 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느껴졌다.

여자와 반려견은 한여름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다. 선명한 파랗고 푸른색이 한여름의 싱그러움을 더해 준다. 특별한 짐 없이 단출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대단한 일을 하러 떠나는 것 같지는 않다. 산책을 하듯이 무심코 집 앞을 나왔다가 지나는 마침 지나가는 버스가 반가워 버스에 올라 보는 것 같다.

여자와 반려견은 버스를 타고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탁 트인 핑크빛 들판을 걷기도 하고, 따뜻한 노란 벽에 기대어 보기도 하고, 푸른 밤하늘을 벗 삼아 시원하게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따스한 전구 불빛 아래 쉬기도 하고, 푸른 숲 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계단을 올라가기도 했다. 비가 오면 함께 비를 맞고, 비가 그치면 불을 피웠다. 저 멀리 끝없는 수평선을 보며 한가롭게 등대 아래를 거닐기도 하고, 바람에 나부끼는 민들레의 살가운 나풀거림을 느끼며, 바람을 느끼며 달려보기도 하고, 푸른 잔디에 넓은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워있기도 했다. 맨발의 촉촉한 기분으로 해변가를 천천히 걸어보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서로 마주 보며 수영도 했다.

이들이 보내는 ‘도망가 있는 시간’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그리고 노래 속에서 ‘너는 혼자가 아니다’는 그 주술 같은 메시지가 반려견과 여자가 함께 있는 모든 그림마다 들리는 듯했다.

그 여유로움이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유로움 즐기는 도망간 그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여유로운 생활의 끝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다시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을 것 같다. 무엇이든 새롭게 할 수 있을 힘이 충분히 생겼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이 같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지쳐 있던 일상 속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기만 했던 침대가 다시 돌아온 그들을 푸근하게 안아주는 듯했다.

나의 힘든 현실을 잠깐 벗어나게 해 주는 ‘동무’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함께 도망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도망가서는 대단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됐다. 무엇이든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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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휴식’ X ‘위로’: 그림책 『도망가자』에 노래를 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