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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Apr 05. 2024

우리들의 할머니, ‘순례 씨’

: 우리 할머니는 김동례

글·그림 채소, 『순례 씨』(고래뱃속, 2022)     




순례 씨의 인생이 노란 꽃무늬 벽지 같은 내지 안에 사진처럼 담겨 있다. 



연지곤지 찍고 시집와서 정 붙여 자식 낳고 키우며, 한평생 살아온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다. 실제로, 순례라는 이름은 작가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성함에서 한자씩 따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이름만큼이나 그림도 사실적이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나는 가구, 두꺼운 솜이불, 벽에 걸려 있는 가족들의 사진, 정각을 알려주는 커다란 괘종시계, 큰 글자 달력, 두꺼운 전집 앞에 놓인 감사패들이 어색하지 않다. 



할머니의 인생이 몇 장의 그림과 몇 줄의 글 속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할머니는 그 인생 속에서 하루하루 고달프지 않은 날이 없었을 것이고, 자신보다 자식과 남편이 먼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굽이굽이 인생의 고개를 힘겹게 넘어오면서 자신을 먼저 챙기지 못한 할머니의 삶에서 할머니가 슬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불평하기보다는 순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할머니가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를 최선을 다해 하나씩 하나씩 잘 해결하면서 한 고개 한 고개를 넘어온 것 같다. 마치 하루하루 인생의 적금을 들 듯이 말이다. 아등바등하며 살면서 그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잘 태우고 살아온 할머니의 삶이 존경스럽다. 



그래서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은 할머니의 집이 텅 비게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다. 혼자서 식사도 하고, 염색도 하고, 화장도 하고, 텔레비전을 친구 삼고, 믹스커피 마시는 여유도 누리고, 동네 사람들 만나 소통도 하고, 밭일도 하는 풍요로운 할머니의 일상이 사람의 온기를 가득 느끼게 만들어 준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소환해 내는 정감 있는 할머니 댁의 그림과 따뜻한 할머니의 온기가 일상을 살아가는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우리 할머니 김동례 씨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김동례이다. 우리 외할머니다. 나에게 친할머니 공태효 씨도 계셨지만, 나에게 ‘할머니’는 김동례 씨가 먼저다.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많은 시간을 내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세련되고 깔끔한 분이셨다. 할머니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파마된 검은색 할머니의 머리는 항상 단정하게 빗겨져 있었다. 특히, 여름이 되면 빳빳하게 풀을 먹인듯한 모시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셨는데, 그 정갈한 모습이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할머니는 바느질 솜씨도 좋고, 음식 솜씨도 좋은 분이셨다. 나의 큰 옷도 뚝딱뚝딱 내 몸에 잘 맞춰 주셨고, 음식도 정갈하고 맛있었다. 할머니의 청국장과 팥칼국수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어려서는 할머니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살림을 하고 살다 보니 좋아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셨던 일인 것 같다. 



할머니는 뉴스 보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셨다. 뉴스에서는 좋은 이야기 보다 험한 이야기가 많아서 세상을 더 무섭게 만든다고 하셨다. 무서운 세상 속에서 할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였다. 할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나는 수도 없이 보고 자랐다.


     

그런 내가 할머니가 떠나던 날 그 곁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펑펑 울었다. 내 눈물 속에 ‘괜찮다, 우리 아가 괜찮다’라는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더 서럽게 울었던 것 같다.


가끔 내가 힘들면 그 음성을 떠올려본다. 할머니의 그 사랑이 여전히 내 안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위안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의 존재 자체를 특별하게 해 주셨던 분이셨다. 이 세상에서 나를 무조건 예뻐해 주고, 귀하게 여겨준 분이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나 일방적으로 흘러넘치는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오늘 유난히 더 우리 할머니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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