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미 Jul 12. 2024

終: 자신에게 외치는 작별인사

: “... 하지만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지.”

고정순,『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만만한 책방, 2020)            




지팡이를 의지해 살던 늙은 산양은 더 이상 지팡이 짚을 힘마저 없게 되자 자신이 곧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늙은 산양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죽기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나며 죽음을 찾아 나섰다.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늙은 산양은 한때 젊고 멋졌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젊음을 누렸던 들판, 절벽 그리고 강을 둘러보자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힘 있는 검은 선과 그것에서 느껴지는 역동감이 젊은 시절의 산양을 나에게도 불러왔다.



늙은 산양은 그 젊은 시절 누렸던 그 자리에서 청춘의 에너지를 떠올리며 죽음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현실은 이미 청춘의 에너지는 증발되었고, 그 자리에는 젊은 산양 시절의 추억만이 남겨져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물에는 늙고 힘없는 산양 한 마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늙은 산양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서 젊은 산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을 향해 자신의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늙은 산양이 진심으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전환점이 된 것 같다. 몸이 늙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막연함으로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 돌아보니 이제 남은 것이 죽음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 또다시 길을 잃은 늙은 산양은 노란색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가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날 더 먼 곳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배낭을 메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본 늙은 산양은 아마도 많이 지쳤을 것이다.



이 그림책을 보는 동안 나는 이 늙은 산양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다닌 기분이었다. 그래서 늙은 산양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내 마음이 ‘턱’하고 놓였다. 한편으로는 ‘집에서 쉰 늙은 산양이 다시 힘을 내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 삶의 에너지를 얻어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안도감과 기대감은 편안하게 잠자는 늙은 산양의 모습에서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늙은 산양은 편안하게 잠자는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노란색 지팡이는 빛을 잃었고, 그 노란빛은 하늘에 닿아 노란 달님을 만들어 주었다. 결국 늙은 산양은 죽음을 맞이할 멋진 곳을 찾아 방황했지만, 그 종착지는 집이 되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먼 곳으로 떠나보려 했던 늙은 산양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죽음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는 것 같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늙은 산양은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다가 자신이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자신의 출생을 알고 오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자신의 사망을 알고 가는 사람은 없나 보다.



다음날, 늙은 산양의 새로운 여정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늙은 산양의 죽음은 안타까웠다. 나는 그림에서 보이는 검은색의 번짐이 눈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소곳하게 누워 행복하게 웃고 있는 듯한 늙은 산양의 모습이 야속하기도 하면서 위안이 되기도 했다. 꼭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거나, 이 세상에 꼭 무엇을 남겨야 할 필요는 없다. 즐거운 청춘을 보내고 마지막 순간에 웃으면서 떠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토닥거림이 스멀스멀 내 가슴 한편에서 올라와 나를 다독였다.    



어떤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수많은 ‘끝’이라는 것의 진짜 ‘끝’은 죽음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죽음 뒤의 삶이라는 것이 실존하는지 그렇지 않은 지 조차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저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삼켜 없애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까지 주는 두려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늙은 산양’을 따라다니다 만난 죽음은 인생의 마침표가 아닌 쉼표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네 삶은 끝났어!’라는 느낌보다는 ‘그동안 이 세상에서 잘 지냈다’고 ‘이제 그만 쉬어’라고 다독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죽음이 인생의 종료 버튼이 아니라, 완성 버튼 같았다. 그래서 그 완성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 웃음 지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죽음을 인생의 쉼표, 완성 버튼이라고 생각하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가 문득 떠올랐다.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에 소풍을 왔다가 그것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서 이곳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했다. 이런 죽음에 대한 태도가 행복하게 웃는 얼굴로 죽은 늙은 산양의 모습에 닿아있는 것 같았다. 죽음은 특별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특별함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잘 놀다 갑니다!’라고 시원스레 지르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홀가분함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앞으로 얼마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두려워 하기보다는 지금의 자리에 감사하고, 욕심은 내려놓고, 사랑하며 소풍 온 기분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흔한 말로, 오늘이 내가 사는 가장 젊은 시간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소망들 속에서 나도 언젠가 늙은 산양이 될 것이다. 그 늙은 산양이 되었을 때, 나는 담담하게 나의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을까? 지나가다 내 글을 보던 아이가 물었다. ‘그럼, 엄마는 언제 죽고 싶은데? 엄마는 몇 살까지 살고 싶어?’ 질문이 거칠어서 순간 당황했다. 그런데 이 물음이 내가 지금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내 손이 더 이상 너에게 필요하지 않을 때, 그때 떠나면 좋겠어’ 죽음은 지금의 삶을 더 소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죽음은 삶에 맞닿아 있었다.



내가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수 있을 때는 죽음을 내가 찾아갈 만큼의 삶에 미련이 없을 때가 될 것 같다. 마치 늙은 산양이 젊은 시절을 충분히 누리고 더 이상 자신을 불태울만한 것이 없는 것을 확인했을 때처럼 말이다. 미련 없이 삶을 살아야 늙은 산양처럼 웃으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10화 終: 산다는 것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