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는 가을을 느끼지 못했다. 한참 덥다가 좀 시원해지나 싶더니 이내 추워졌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등교를 했다가 다시 겨울 방학이 되면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을 기다렸다. 어린 나에게 가을은 추석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는 짧게 스쳐 지나쳐간 가을이 점점 메아리가 되어 쓸쓸함을 더 하고 있다. 그 메아리는 언제 내가 외쳤던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나의 추억과 외로움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아마도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다면, 지금 내 인생이 가을 어디쯤이기에 봄과 여름에 전혀 들리지 않았던 그 메아리가 크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돌아보고, 인생을 조금씩 내려놓는 시점에서부터 메아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던 봄을 지나 열정과 도전으로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나를 위해 울고 웃었던 봄과 여름을 지나고 보니 열매 몇 개를 손에 쥔 채 가을을 맞았다.
가을의 하늘은 너무나도 높고 푸르고 아름답다. 그런 하늘이 초라해지는 나를 위로하듯이 내려다보기도 하고, 나무라듯이 내려다보기도 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자연이 점점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무심코 지나가던 꽃들의 향기와 모습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선선히 부는 바람의 떨림도 나를 설레게 하고, 흐르는 냇물의 소리도 나를 쉬게 한다. 나의 무딘 감각들이 자연을 향해 예민하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막 가을에 들어선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 두렵다. 나에게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은 그저 하얀 눈에 덮여 버린 메마르고 앙상한 자연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절망감이 있다. 물론 겨울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운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봄과 여름을 지내 본 나는 겨울의 그 차가움을 녹여내고 탄생한 그 봄과 여름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없는 겨울의 뒤를 생각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가을이 지나고 나면, 다가오지도 않은 겨울을 서글프게 생각하며, 나에 대한 연민에만 빠져 주저하는 마음으로 이 가을을 보낸 것을 분명히 아쉬워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가을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
내 인생의 가을에도 나의 봄과 여름에 있었던 열정이 필요하다. 내가 지나온 봄과 여름은 나만을 위한 열정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가을에 필요한 열정에는 책임감이 뒤따른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서 기뻐하고 슬퍼했던 봄과 여름의 열정을 사치처럼 느껴지게 한다. 가을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둬들여야 하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되는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그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앞선 뿌린 씨앗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는데 걸린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으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더 많은 열정과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가을은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거두어들인 열매에 만족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가을에 들어서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가을에 들어선 사람은 지금까지의 시간의 결과물로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있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나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 그 버거움을 견뎌내야 한다. 세상에 이해받기보다 세상을 이해하면서 어른다운 성숙한 태도로 내가 이뤄내야 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조바심을 잘 감춰내야 한다. 호수 아래로 정신없이 물길질을 하고 있으면서 잔잔한 호수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처럼 말이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하고, 약해진 신체만큼이나 마음도 많이 약해져 오히려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하지만 금방 의지할만한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의지했던 곳들도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이런 가을을 지나고 나면 오히려 겨울이 따뜻하고 아늑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지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은 어떤 것이든 섣부르게 판단할 수가 없다. 지나고 나면 이 시간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할 것을 알아서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인생은 현재를 ‘괜찮아!’라는 말로 다독이고, 알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오늘도 ‘괜찮아!’라는 말로 나를 다독이고, 한 호흡 깊게 들이쉬고 내쉬어 본다. 문득, 내 인생에서의 봄이 태어나 자라면서 시작되어 그 성장으로 인해 여름을 맞고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면서 가을에 들어섰다는 것이 매우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나를 되돌아보며 별다른 굴곡 없이 살아온 것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그 감사한 마음이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을 두려워하기보다 용기 있게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