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라는 부메랑

by 박세미


<1>

아이랑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납골당 앞에서 가족들이 오열을 하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희뿌연 내 시선 안으로 눈이 똥그랗게 커진 내 아이의 얼굴이 쓱 들어왔다. 그리고 눈보다 더 커진 아이의 목소리가 슬픈 공기 사이를 비집고 카랑카랑 울려댔다. “엄마, 왜 울어?” “엄마, 저기는 어디야?” “저 항아리에는 뭐가 들어 있어?” “저 뼈 가루는 어떻게 만들어?” “그럼 죽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저기다가 같이 넣어주는 거야?” “그럼 난 아빠가 죽으면 핸드폰을, 엄마가 죽으면 맥주를 넣어줘야겠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슬픈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엄마, 아빠 저렇게 되지 마. 내가 말도 잘 듣고 훌륭한 사람도 될게’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인가.


아들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보기보다 내가 보여주는 것만을 본다.


<2>

아이 친구의 엄마들 모임에 갔다. 이들을 만날 때마다 전쟁터의 전우 같은 심정이 든다. ‘나도 힘든데, 너도 힘들지.’ 앞에 몇 마디만 입을 떼도 누가 뭐랄 것 없이 ‘그래, 그래’라면서 내 편을 들어준다. 그리고는 누가 더 힘든 아이를 키우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마냥 그동안 숨겨두었던 창피한 자기 아이의 흉을 꺼내 놓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그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 걸 그랬나 싶지만, 일단 내 속을 다 비어 내고 와서 그런지 내 마음에 잠시 동안의 평화가 머문다. 내 아이와의 전투가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 말이다.


그 모임에는 딱 한 명의 여자아이 엄마가 있다. 그 엄마는 평상시에도 조용하고, 말도 조곤조곤 속삭이듯 하는 사람이다. 그 안에 분노의 그림자조차 전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신이 저 사람에게는 딸을 주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한 마디 했다. ‘아이가 하도 제 말을 듣지 않아서 아이에게 내가 널 잘못 가르쳤구나. 내가 잘못한 것이니, 그럼 날 때리라고 말했어요. 예전 이야기처럼요. 그러면 아이가 뭔가를 깨닫고 반성할 줄 알았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아이들의 엄마들은 박장대소했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얌전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엄마도 아니기 때문에 아이에게 저런 제안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가 아들에게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차라리 엄마를 때려라!’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가 보일 반응이 예상된다. 아들의 얼굴에는 우리만 눈치챌 정도의 옅은 미소와 함께 ‘것 봐, 엄마도 잘못했지? 근데 엄마, 진짜 때려도 돼? 진짜? 그럼, 진짜 때린다. 엄마 몇 대 때려? 여기, 여기 때려? 너무 세게 때리지는 않을게. 이거 엄마가 시킨 거야, 나중에 뭐라고 하면 안 돼!’라며 신이 나는 기분이 느껴질 만한 질문들로 우리를 가격(加擊)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맞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들은 내 말의 행간을 이해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3>

친구에게는 딸이 둘 있다. 그 집 큰 딸과 우리 아들은 18개월 차이가 난다. 난 내 아이가 오빠답게 행동하기를 바랐지만, 그건 말 그대로 나만의 바람일 뿐이었다. 아이는 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내가 친구의 딸들을 예뻐하는 것을 서운해했고, 그것을 자신의 분노로 표출했다.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닌데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아이를 이해할 여유가 없어진다. 지금은 왜 혼이 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그때는 나 역시 매섭게 아이를 몰아쳤다. 그런 내 아이를 내 친구가 안아주면서 달랬다. 친구는 ‘엄마가 그래서 화가 났고, 네 마음도 이모는 이해해.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하자’는 이야기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구름 위를 걷는 목소리로 살포시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그 느리고 조심스러운 구름의 발자취가 살포시 아이 위에 내려앉는 순간에 ‘훅’ 사라졌다.


‘이모, 근데 이 목걸이는 이모 거예요? 어디서 났어요?’


아들은 자신의 서운함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고, 이미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일을 마무리하기보다는 혼이 났으니 일이 끝난 것으로 이해한다. 아들에게 조곤조곤한 설명의 위로 따위는 사치다.


<4>

아들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학원에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일은 없지만, 자기는 왜 게임을 하면 안 되냐고 묻는다. 앞도 뒤도 없다. ‘게임’이라는 말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아이는 자신만 게임을 하지 않으니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 수 없다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게임에 대해 물어보면 질문이 너무 유치해서 분위기가 어색해진다고 한다. 게임 앞에서는 당당했던 자신이 움츠려 든다면서 아이는 자신의 어깨를 한껏 웅크려 보였다.


아들이 유치원 다닐 정도까지는 그 친구들과 식당에 가면 아이들의 번잡스러움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항상 주변을 신경 썼다. 그랬던 아이들이 어느 때부터인가 어딜 가나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다. 아이들은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입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게임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 공간 안에서 부모 없이 자기들끼리 만나고, 그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 나간다. 더 이상 시력이 나빠진다거나 절제하지 못하면 생활을 망칠 수 있다는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이유들로 그 공간을 우리 아이에게만 닫아 놓을 수는 없다. 우리 아이만 그 문 밖에 서 있게 할 수는 없다. 그 문 밖에 우리 아이 말고 다른 아이들이 있기를 바랐지만 아이들은 하나 둘 그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아들에게는 자신의 사회생활에서 공부할 명목은 없지만, 게임할 명목은 충분하다.


<5>

아이에게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노트북을 열어 놓고 열심히 무엇인가 하고 있었다. 슬쩍 지나가면서 보니 표를 그리고 있다. 뭔가 중얼거리면서 연습장에 계산까지 하고 있다. 나는 아이가 방학 시간표를 만드는 줄 알았다. 한 참 만에 나온 아이 손에는 아르바이트 계획서가 있었다. 방학 동안 우리 동네 가게 앞 뽑기를 원 없이 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엄마가 그것을 시켜주지 않을 것 같아서 자신이 용돈을 벌어서 뽑기를 마음껏 하겠다는 것이다. 가게 앞 뽑기는 한 판에 500원이다.


아이는 ‘용돈 벌이 및 학습 계획’이라는 제목 아래, 용돈 벌이에는 ‘내 방 청소,’ ‘장보기,’ ‘집안일 돕기’의 항목을 넣었고, 학습에는 국어, 영어, 수학에 대해서 자신이 해야 하는 것들을 써 놓았다. 아이는 일의 경중에 따라 금액을 달리해 놓았고, 자신이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써 놓았다.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 동시에 아이가 부모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보였다. 아이는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용돈으로 환산해 놓았다. 그 금액은 자신의 노력 정도와 학습의 난이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용돈은 200원부터 600원까지로 측정되어 있었다. 책 읽는 것은 200원이었고,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은 300원, 영어 독해 문제를 푸는 것은 400원, 선행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600원이었다. 그리고 그 학습마다 ‘스스로’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하게 되면 그에 대해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다.


아이와 협상을 시작했다. 용돈벌이에 대해서는 노동의 정확한 내용과 경중을 정하였다. 학습계획에 대해서는 학습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용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정리했다. 오히려 그 학습을 하지 않을 때, 벌금을 내라고 남편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아이는 벌금에 놀라기보다는 용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 날부터 아이는 작은 수첩에 날짜와 자신의 노동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그것을 합산해서 나에게 청구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학습에 대해서는 따로 기록하지도 않았고, 별다른 언급도 없이 숙제조차 내가 ‘시켜야’ 해가는 일상이 흘러갔다.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나를 설득할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나 내놓아야 해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내놓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얻는 것에만 집중한다.


아들은 때로는 자신이 놓아 버리는 것이 자신에게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른다.




아들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화만 부를 때가 있다. 이것이 아들의 흉이 되어 나를 잘 아는 친구들에게 떠들고 나면, 뜻하지 않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너네!’


세상의 모든 아들이 우리 집 아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집 아이는 나와 남편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들고 있다. 아이가 내 모습을 가진 부메랑으로 던져진 것을 나는 평상시에 잊고 산다. 내가 아이에게 던진 그 화살들이 곧 나를 향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 생각지 못해 맞고 쓰러지기보다 돌아올 자리를 예상하고 안전하게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욕심이지만 아들은 나와 남편의 좋은 점만을 안고 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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