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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Jul 19. 2022

엄마의 숙명

: 가르쳐야 할 것만 가르치고 떠나보내기

『나는 사자』

글/그림: 경혜원, (비룡소, 2021)




‘나는 사자’라는 책의 제목만을 들었을 때, 윤기 나는 붉은 갈기를 가진 라이온 킹(The Lion King)의 심바를 떠올렸다. ‘사자’는 용맹스럽고 강인하게 자신의 무리를 이끄는 수사자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나는 사자’라는 제목 아래는 매서운 눈빛과 유연한 몸짓이 느껴지는 암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사자’라는 단어에서 왜 수사자만 생각했는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실소가 나왔다.



‘나는 사자. 여기는 내가 사는 곳이야’로 시작하는 암사자의 독백이 흑백의 배경 속에 늠름하게 서 있는 암사자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마치 핀 조명을 받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흑백 영화 같다. 암사자의 그림에서 몸의 입체감과 털의 질감이 느껴지고, 한가롭게 모여 있는 기린 무리를 뒤로 하고 늠름하게 서 있는 암사자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이 암사자는 임신한 상태이다. 임신을 했지만 사냥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이 암사자의 엄마가 임신했을 때도 사냥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사자의 자궁은 두꺼워 임신 중에도 사냥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암사자는 자신의 엄마처럼 임신한 몸이지만 배 속에 새끼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사냥에 성공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사자의 눈빛에서 그 확고한 다짐이 보인다. 그 눈동자에 비치는 얼룩말이 불쌍하기도 했지만, 생존을 위한 사자의 결연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암사자들이 ‘여기는 우리가 사는 곳. 우리는 사자야!’라고 외치며 금방이라도 책 밖으로 뛰쳐나올 듯이 달려온다. 역동적인 암사자들의 움직임이 사자들의 삶이 앞으로도 이들에 의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어떤 암사자가 이끌어가다가 멈춰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암사자들이 자신들의 것들을 대를 이어 알려주면서 그 종족을 번성시켜 나갈 것이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나’로 시작해서 ‘우리’로 끝나는 이야기를 통해 특별한 주연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그 종족을 유지해 나가는 주연이 되는 이야기라는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일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사냥감을 정한 암사자는 주저하지 않는다. 재빠르게 달려가 먹이를 낚아챘다. 사자가 얼룩말이나 물소를 쫓아갈 때의 거친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서로가 쫓고 쫓기면서 일으켜진 먼지바람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보는 내내 몸에 힘이 들어간다. 은은한 먹의 분위기가 스며 있는 배경 속에 평화롭게 모여 있는 사자 무리를 만나서야 비로소 긴장했던 힘이 빠져나간다.



사자들은 함께 사냥을 하고 함께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새끼 사자도 함께 키운다. 사자들에게 ‘함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사자가 제아무리 용맹하고 사납다고 할지라도, 허허벌판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그들의 강인함이 배가 될 것이다.



암사자는 자신의 엄마에게 배운 사냥하는 법과 잡은 먹이를 다른 동물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법을 모두 새끼 사자들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 새끼 사자들이 다 자라면, 이들 중 수사자는 무리를 떠나고, 암사자는 엄마 사자와 함께 그 무리에 남아 자신들의 땅을 지켜나간다.



사자는 무리가 함께 살면서 함께 사는 법의 중요성과 사냥과 잡은 먹이를 지키면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것은 사자가 야생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것인 것 같다. 그리고 사자는 자신의 품에서 새끼를 떠나보낼 때를 알고 그 시기를 받아들인다. 암사자는 새끼를 임신한 상태에서 사냥하는 것도, 새끼 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도,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도 모두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암사자의 모성은 본능이다. 그 이상의 이유나 의미가 없다. 수사자에 대한 도움이나 새끼 사자들의 능력에 대한 기대도 없다. 암사자는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엄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역할에 충실했다. 자신이 들인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순리에 따라 살뿐이다.  



우리는 엄마가 되었다고 ‘엄마’라는 말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엄마의 역할’에 능숙해지지도 않는 것 같다. 엄마의 역할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반응들에 먼저 지치는 것 같다. 엄마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하게 될 뿐이다.



암사자의 삶을 지켜보며 ‘엄마’라는 말이 주는 책임에 버거워하고 자신이 가진 그 이상의 것들을 자녀들에게 주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나의 엄마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나의 자녀들에게 흘려보내주는 것에 만족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우리는 안전하게 살아갈 방법만을 알려주고 싶은 욕심이 앞서 아이가 만들어나갈 세상을 미리 재단해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기보다는 세상의 기준에서 필요한 것들을 부모가 먼저 채워주려고 하기도 한다. 게다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기에 앞서 아이가 성장할수록 내 아이가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아이만의 능력을 최대치로 키워주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다. 그것이 엄마의 욕심으로 채워져 나가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욕심에 미치지 못하면 안타까워하고, 그것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죄책감까지 느끼는 것 같다. 아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사랑과 믿음으로 북돋아주기보다는 살아가는 기술을 가르쳐 주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 같다.



우리는 내가 받은 가르침에 지금의 시대가 원하는 것들을 더 얹어 아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가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부모나 아이를 힘들게 한다면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신의 부모로부터 배운 것들을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가 있다. 엄마의 숙명에 교사, 상담사, 판사 등의 역할을 끼워 넣을 필요는 없다. 집으로 돌아온 자녀에 따뜻한 밥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도 엄마의 역할은 충분할 수도 있다. ‘엄마’라는 말에 스스로가 너무 많은 짐을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의 한 마디>


새끼 사자들의 성장 이야기라고 예상했는데, 암사자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암사자들에게도 수사자 못지않은 용맹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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