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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Jul 11.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10)

10.

   내가 여자를 만난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남편도 이제는 자신과 여자와의 관계를 내가 알아버렸으니 어떻게든 끝을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갔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심각하게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끝낼 것인가?


  나는 아버지의 끝없는 불륜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의 복잡한 여자관계는 열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과수원을 했다. 주변에서는 꽤 큰 규모였다. 원래는 할아버지의 땅이었는데 내가 태어났을 무렵, 엄마가 어린 묘목들을 심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재직했기에 농사는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우리 과수원은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마당 끝에 서면 동네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어린 내가 동네까지 혼자 놀러 가기엔 멀었다.

나는 마당 끝에 심긴 미루나무를 의지하고 서서 동네 구경을 하며 혼자 놀았다.


  마을을 구경하다 보면 어린 내 눈에도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 낯선 사람이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이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이었다. 나는 집 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엄마, 누가 우리 집으로 오고 있어!”

 그러면 뭔가를 하느라 바쁜 엄마가 큰소리로 되물었다.

“누구 같아?”

“모르겠어. 분홍치마 입고 양산을 썼어.”

 내가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큰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밭을 매다가도,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도,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도, 하던 일을 멈추고 방으로 달려 들어가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러다 보면 여자가 숨찬 걸음으로 땀을 닦으며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엄마는 마루에 여자를 앉히고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여자와 함께 외출을 했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다.


  나는 외따로 떨어진 집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은 언제나 엄마를 따라나섰다. 울고불고 매달리는 동생의 고집을 엄마가 이기지 못했다.


  나중에야 나는 그 여자가 아버지와 바람이 난 여자였고, 임신을 해서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내 어릴 적 기억에, 그런 여자가 여럿 찾아왔었다.

  어떤 여자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고운 한복을 입고 있었고, 어떤 여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더 많았다. 그것은 대부분이 술집이나 다방에 다니는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를 데리고 산부인과를 찾아가 임신 중절수술을 해주고 얼마의 돈을 쥐어 보냈다고, 이웃집 할머니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유명했다. 호적에 오른 여자도 여럿이었다. 잠시 거쳐 간 여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금도 내 호적에는 이름이 낯설고 얼굴도 모르는 형제가 여섯이나 있다. 나와 내 동생까지 합하면 서류상, 우리 형제는 여덟 명이다.


 나는 그 속에서 속앓이를 하는 엄마를 보며 자랐다. 그러면서 내게는 자연스레 불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정적으로, 더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엄마가 느꼈던 모든 감정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아픈 기억으로 새겨졌을 것이다.


  나의 도덕적 감성에는 도둑놈보다, 살인자보다, 더 나쁜 부류가 바람피우는 놈이나 년이었다. 내 귀중한 물건을 훔쳐가더라도, 설사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용서가 될지언정 불륜은 절대로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믿는 마음에 대한 배신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돌아올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억울함과 배신에 대해서 온몸으로 앓고 있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우리는 아기의 출생 신고는커녕,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였다. 더군다나 나는 그 당시 주민등록증도 없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시점에 임신중독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금을 내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들어가야 할 돈의 순번에서 주민등록증의 벌금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당장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법의 테두리에 가둘만한 것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할 거 같은데 명확한 답을 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병원을 찾았다. 그때까지 나는 병원이라고는 문턱도 밟아보지 않았었다. 아기를 낳을 때도 병원이 아닌 집에서 낳았잖은가? 그런 내가 찾은 곳은 종합병원의 정신과였다.

(그때는 개인병원에서 진단의뢰서를 발급받지 않아도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 정신과에 가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나서였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래 기다린 끝에 의사와 마주 앉았다. 의사가 어떤 게 불편해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남편이 바람이 났어요.”라고 대답했다. 의사가 진료기록지를 들여다봤다. 아마도 내 나이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실을 언제 알았어요?”

의사가 물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의사의 그 짧은 질문에 나는 울음보를 터트렸다. 그리고 나는 내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시부모 얘기, 우리 아기 얘기, 내 마음, 바람 난 남편 얘기••• 의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한참을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의사가 겨우 하다는 말은,  “잠은 좀 자시나요?”였다.

“며칠째 잠이 오지 않아요.”

 “약을 좀 처방해 줄게요. 좀 드셔보시고 그래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거나 지금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다시 오세요.”

내가 가슴속 깊은 곳을 털어내놓고 받아 든 것은, 삼일 치 약봉지였다.


 집에 돌아와서 아기의 밥은 어떻게 해 먹였는지,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내가 아기의 밥을 잘 챙겨 먹이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 밥 먹어야지.”

 네 살이 채 되지 않은 아기가 제 몸보다 더 큰 쟁반을 들고 끙끙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며칠 전에 해놓은 찬밥 한 그릇과 신김치 몇 조각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준 약을 먹고 며칠 째 잠만 자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약을 먹으면 잠이 왔다. 그러나 오래 자고 나도 개운한 느낌은 없었다. 하루 종일 구름을 밟고 다니는 듯이 몽롱했다.


  챙겨 들어온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그 애의 온기가 내 머리에 느껴졌다.

아기는 어느새 아이로 자라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신 차리자.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병원에서 준 약을 먹지 않기로 했다. 이틀을 먹고 난 후였다. 그리고 일어나 아이를 씻기고 나도 세수를 했다.

 그날 오후에 나는 미용실로 가서 머리를 잘랐다. 그동안 미용실 가는 돈을 아끼느라 자라는 대로 기르고 있던 머리였다. 머리카락이 등을 덮고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마치 그동안 살아온 고달픈 삶의 길이 같았다. 그것을 단발머리로 잘라버렸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거울 속에서 야윈 얼굴에 짧게 자른 머리.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얼굴을 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묻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어떡할래?'

 나는 거울 속의 여자를 보다가 내 손을 꼭 잡고 내 옆에 기대서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 집에 가자."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온통 불안감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기억해 냈다. 내가 너를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한 약속을.

나는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꼭 껴안았다.

"그래 집에 가자. 우리 집으로 가자."


남편이 돌아와도 좋고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이와 둘이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는가.


 그때 나는 무엇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 나이,

스무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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